[한국교회와 함께 한 국민일보의 25년] 꿈과행복의교회 최훈조 목사 “제가 ‘국민일보 창간독자’입니다”
입력 2013-12-10 01:54
국민일보는 한국교회의 벗으로 걸어왔다. 교회 본연의 사명인 전도와 선교, 이웃을 섬기는 일과 함께 교회를 공격하는 반기독교 세력과 이단·사이비 단체에 맞서 성도들을 지키는 방패가 되기도 했다. 지난 25년 동안 한국교회와 함께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봤다.
부산 재송동 꿈과행복의교회 최훈조(59) 목사는 내년이면 환갑이다. 그러나 그에겐 아직도 이루고 싶은 꿈이 많다. 이를 위해 매일 10시간씩 꼼짝 않고 공부한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섭렵하고 지금은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다. 국민일보 창간독자인 그는 “노력하다 실패하면 국민일보에 실린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꿈과 비전의 기사들을 보면서 힘을 냈다”고 말했다. 이젠 그가 국민일보의 또 다른 독자에게 꿈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희망을 심어주려 한다. 지난 7일 부산의 교회에서 최 목사를 만났다.
13세의 꿈을 만학으로 이루다
충남 부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했던 그는 11세 때 친구를 따라 교회에 처음 나갔다. 마침 부흥회가 열리고 있었다. “성령 받고 철야예배를 드리며 3일간 특이한 영적 체험을 했어요. 그때 목사, 부흥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날 이후 십리 길을 걸어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설교 연습도 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자마자 그는 새엄마에게 쫓겨났다. 대전역 앞에서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문득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거기에 좋아하는 영어까지 잘 하고 싶었다.
“영어로 설교하는 목사가 되자.”
그렇게 13세 소년은 꿈을 향해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도착한 소년은 거리를 헤매다 교회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먹고 자다 어느새 ‘반 목사’가 됐다. 아예 교회학교 교사로 나선 것이다. 주일엔 교회학교 교사로, 낮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좋아하는 영어 단어를 외우며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야간 신학교를 졸업하고 군종 사병으로 3년간 설교만 했다.
“군 제대 후 교회를 개척했지만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는 목회를 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검정고시를 치른 후 35세에 서울신대에 편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지요.”
13세 때 꿈꿨던 영어 설교를 감당하기 위해 도전은 계속됐다. 삼수 끝에 46세의 나이로 한남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 4년 동안 지각, 결석 한번 없이 평균학점 A로 영문학사와 일문학사 학위를 동시에 받았다. ‘21세기를 이끌 우수 인재상’인 대통령상도 수상했다. 석사과정도 마쳤다. 최 목사는 지금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설교한다.
‘함께하는 꿈’을 꾸다
그에겐 재능이 많다. 한때 성악가를 꿈꿨을 정도로 노래를 잘했다. 한남대 재학시절 교내 가요제에서 인기상, 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경력도 있다. 현재 가수협회 등록 가수다. 시를 좋아해 3권의 시집도 출간했고 최근엔 연극배우로 무대에도 섰다.
취미도 독특하다. 40여년 전부터 2만여권의 책을 사서 수집 중이다. 기독교 희귀본이 수천권에 달한다. “신학생 때 돈이 없어 청계천 헌 책방에 자주 갔어요. 거기서 우연히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집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설교 LP판을 비롯해 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 전도집회 LP 전집, 유명 시인들의 작품집 등 다수를 가지고 있어요. 이를 전시할 기독교박물관을 설립하고 싶습니다.”
또 하나의 ‘고전’. 국민일보 창간호도 간직하고 있다. 기독교 정론지로 출발한 국민일보에 대한 기대가 컸던 그는 빛바랜 신문을 펼쳐 보이며 애독자로서의 바람도 잊지 않았다. “요즘 상처 입은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화해와 치유를 전하는 신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독교세진회 부산지부 회장도 맡고 있는 그는 “특히 국민일보가 소외이웃, 교도소 사역에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위해 나누고 섬기는 ‘함께하는 꿈’을 펼쳐야 한다”고 덧붙였다.
부산=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