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사회변화 에너지] 일한다, 유리천장이 깨지는 그날까지…

입력 2013-12-10 01:33


한국사회 여성 파워 현주소

최근 내한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한국이 프랑스보다 미래지향적인 것 같다”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생은 국가의 수장 자리에 여성을 앉혀도 괜찮다는 국민적 인식이 생긴 것으로, 국가가 현대화된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반론이 없진 않으나 여성 대통령의 탄생으로 한국 사회의 여성 지위 상승과 양성 평등 확산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은 암울하다. 새 정부 들어 여성 고위직 공무원 숫자는 별로 늘지 않았다.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장관 중 여성은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과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 2명뿐이다. 조 장관은 최근 한 행사에서 “우리나라엔 하나의 여성부와 16개의 남성부가 있다”는 말로 어려움을 토로했다.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고위직 대부분이 남성이고 여성의 삶을 잘 모르기 때문에 여성의 현실과 입장을 정부 정책이나 예산에 반영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올해 발표된 각종 지표를 보면 기업 등 민간 영역은 더 심각하다.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가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을 맞아 공개한 2011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유리천장 지수(Glass Celling Index)에서 한국은 꼴찌를 기록했다. 100점 만점에 15점. 1위 뉴질랜드(89점), 2위 노르웨이(86점) 등과 비교해보면 고개를 들 수 없다. 유리천장은 조직에서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뜻한다. 이 수치는 한마디로 한국이 OECD 국가 중 여성이 출세하기 제일 어려운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기업지배분석 기관 GMI레이팅스가 발표한 3월 말 기준 한국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1.9%로 대상 국가 45개국 중 43위였다. 한 대기업의 여성 과장은 “사원으로 입사한 뒤 능력을 인정받아 임원에 오른 여성 간부를 찾아볼 수가 없다”며 “롤 모델이 없어 더 막막하다”고 했다.

선진국에서는 여성 인력의 활용 없이 경제성장은 물론 ‘더 나은 사회’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결혼, 출산, 양육, 자녀교육 등의 이유로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데 따른 경제적 손실이 크다는 것을 기업이나 정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도 여성의 인력 활용이 국가 경쟁력 제고의 핵심이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LG경제연구원이 6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대 대졸 여성이 경력단절을 겪을 경우 한 명당 손실액이 6억3000만원에 달한다. 여성들이 일하지 않으면서 생기는 문제가 당사자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고용률 70% 로드맵’ 등을 통해 여성 인력 활용에 대한 의지를 천명한 상태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각종 제도를 지원하고, 남성 중심의 제조업과 대기업에서 여성 참여 비율이 높은 서비스업, 중소기업으로의 고용 패러다임 전환도 꾀하고 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제2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선 여성의 경제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시간선택제 일자리 창출에 주력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국내 여성 인력 활용의 핵심 과제인 경력단절 여성들의 재취업 문제 해결을 위해서다. 통계청 추산 경력단절 여성은 190만명. 특히 30∼34세 경제활동 참가율이 최저를 기록하는 ‘M자형’ 곡선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김난주 연구원은 “경력단절 여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고용률 70%를 달성하기란 불가능하다”며 “무엇보다 고학력 중산층 여성의 재취업률을 높일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여성계와 재계는 CJ그룹의 ‘리턴십 프로그램’이 좋은 본보기로 정착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CJ그룹 내 10개 주요계열사 32개 직무 분야에서 지난 8월부터 6주간 인턴 근무를 거친 100여명이 4시간, 6시간, 전일제 등으로 근무 중이다. 손복희씨는 ‘CGV 유니버시티’에 취업했는데, 10년 만에 직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지난 6일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제도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배려해줘서 적응할 수 있었다”며 “재취업 용기를 내지 못하는 여성들이 많은데 이런 일자리가 좀 더 늘어나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