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다시 일어선다] 일군다, 27세에 찾아온 암 딛고 새 삶을…
입력 2013-12-10 01:30
난소암 이긴 아동도서 일러스트 작가 수신지씨
“젊음보다 귀한 건 없다. 젊음은 모든 걸 가능케 한다.”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아픔과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찾아 꿋꿋이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다. 난소암 투병 후 그림책 작가로 새 삶을 찾은 수신지씨를 만나 오늘날 청춘의 의미란 무엇인지 들어봤다.
“내 뜻대로 그려도 책이 되다니, 신기하고 보람찼어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아동도서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하던 수신지(예명·34)씨는 2006년 11월부터 6개월간의 난소암 투병기를 그래픽노블(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 ‘3g’에 담아냈다. 3g은 그가 떼어낸 한쪽 난소의 평균 무게다.
서울 서교동 카페에 지난 달 25일 오후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타난 수신지씨는 한때 암 투병을 했다고 보기 힘들 만큼 해맑았다. 미소 가득한 얼굴로 “두 계절을 병실에서 보내면서 느낀 점을 인생 후배들과 나누고 싶다”며 입을 열었다.
그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면서 수동적인 그림을 그렸다”고 고백했다. 출판사의 주문대로 글에 걸맞은 그림을 ‘잘 그리는’ 데만 신경 썼다. 작가는 “앓게 되니까 문득 그리기 위해서만 노력하고 남의 입맛에 맞는 그림만 그리다 죽으면 허무하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만의 스타일이 담긴 ‘3g’은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그래픽노블이란 장르도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작가는 “자연스럽게 손 가는 대로 내 모든 걸 꾹꾹 눌러 담아 가장 나다운 그림을 그렸다”며 “내 뜻대로 그려도 책이 되다니 보람찼다”고 전했다.
젊음이 한창이던 스물일곱의 가을이었다. 배가 이상하다고 느낀 수신지씨는 별다른 고민 없이 당시 남자친구와 병원을 찾았다. 몇 번이나 병원을 옮기며 끝내 받은 진단은 난소암이었다. 놀랐지만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기에 슬프진 않았다고 한다. 암세포가 크고 수술이 급하다는 내용을 사무적으로 전하는 의사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암이라고?’ 하는 식상한 의문 때문이기도 했다. 수신지씨는 “수술 전날 밤 ‘죽어도 책임 없다’는 내용이 담긴 동의서에 엄마와 서명을 하면서야 실감이 났다”며 “그날 밤 엄마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전했다.
그는 자신의 병이 ‘난소암 3기’ 같은 객관적인 숫자로 정의될 때마다 견디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외모로 나타나는 변화였다. 꾸미기 바빠야 할 나이에 머리카락이 빠졌고, 독한 약에 얼굴이 퉁퉁 부었다. 작가는 “책에는 이 기회에 제일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찾아보자는 식으로 유쾌하게 표현했지만 스물여섯 아가씨에겐 참 힘든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투병은 삶의 태도를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시간의 유한함을 느끼고 나니 스스로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게 됐다. 막연하게 미뤄둔 생각, 꿈만 꾸던 계획도 실천에 옮겼다. 그렇게 펴낸 책이 ‘3g’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꼬박 2년이 걸렸다. 자신만의 그림체를 풀어내는 것도, 투병 기간 친언니가 찍어준 사진을 보며 기억을 찬찬히 떠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심리적으로 힘든 작업이자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사투였다.
작가는 “병상 수기로서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도 욕심을 내고 싶어 신파가 되지 않게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퇴원 1년 만에 영국 유학을 떠난 것도 큰 실천이었다. 통원 치료를 받으며 유학박람회에 다니고 인터뷰를 치러 틈틈이 유학 절차를 밟았다. 그는 “형편과 여건이 되고 준비가 되고…. 그렇게 다 갖춘 뒤에 하려고 미뤄둔 것들, 내 것이 아니라고 여겼던 먼 꿈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전했다.
투병 당시의 그처럼 20대를 보내는 후배들에게 수신지씨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돈을 못 번단 생각을 버리라”고 당부했다. 그는 “내 맘대로 그린 그림은 안 된다는 고정관념은 부질없었다”며 “남들 하는 방식대로 해야만 세상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수신지씨가 투병을 통해 깨달은 것은 조급한 시기를 견디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단 점이었다.
그는 구체적으로 “지금 겪는 일이 어떤 식으로든 남은 삶에 도움이 될 테니 기록하고 사진 찍고 기억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경험을 표현하고 싶은 건 모두의 본능”이라며 “지나고 나면 나처럼 난관을 거쳐 성장한 경험을 공유해서 많은 이들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2011년 1월 프랑스에서 열린 ‘앙굴렘국제만화전시회’를 계기로 현지에서 출판돼 먼저 인기를 얻은 ‘3g’은 국내 출판사를 통해서도 소개됐다. 그해 여름엔 두 번째 작품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로 ‘대한민국창작만화공모전’ 단편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부상으로 받은 상금으로 병원을 돌며 릴레이 전시를 열기도 했다.
수신지씨는 올 봄 병상을 지켜주던 오랜 남자친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요즘은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장편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암 투병처럼 특수한 소재가 아니어도 만화를 잘 그릴 수 있단 자신감이 생겨 든든하다”고 했다. ‘3g’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는 또 한번 인생의 새 봄을 맞고 있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