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정한 (5) 1995년 불혹의 기도 “주님, 새 삶의 길 알려주세요”

입력 2013-12-10 01:32


내가 아내로 인해 신앙을 갖게 됐지만 사실 군복무 기간 중에 신앙도 없으면서 군부대 주일학교 교사를 잠시 맡았던 적이 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를 부르신 것이었는데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수부대에 근무했던 나는 어느 주일날, 혼자 낮잠을 자는데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흰 수염이 길게 난 서양 사람이 나타나 “정한아 일어나라. 지금 어느 때인데 이렇게 한가하게 자느냐. 저기 가면 네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했다. 놀라서 일어나 마을로 나가 걷다 보니 꿈에서 본 곳과 똑같은 곳에 내가 서 있었다. 그러고는 그 바로 앞에 교회가 있어 들어갔다. 알고 보니 영 밖 군인교회로 군종병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것을 계기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교회를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제대 후엔 예전의 생활로 금방 돌아갔다.

대학 3학년 때 결혼을 한 나는 잠실 주공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4학년 때 당시 충무로에 있던 ‘한국 후지필름’에 입사했다. 입사 3년째가 되니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마침 서울 장안동에 가죽의류 봉제공장을 운영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다. 나는 바로 사표를 제출하고 전혀 경험이 없는 가죽봉제 사업을 했다.

대기업 하도급을 받아 초기에는 그럭저럭 사업이 됐는데 직원들이 30대 초반 사장을 우습게 봤다. 내가 강한 스타일도 아니고 부드럽게 잘 대해 주는 편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하도급 일이란 게 일거리가 밀려오면 너무나 많고 없으면 그대로 손놓고 있어야 해 수지가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직원관리가 너무 힘들었다.

결국 2년 만에 손을 들고 재도전한 것이 시계 제조 공장이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시계회사에 영업부장으로 입사했다 이를 인수한 케이스다. 대학원에 들어가 무역 쪽을 공부해 열심히 일하자 사장은 내게 동업을 제의했다. 1년 후에는 아예 회사 전체를 인수받았다. 수출이 매출의 90%를 차지하는 우리 회사가 갑자기 가격이 싼 중국시계들이 밀고 들어오자 맥을 못 췄다. 이 사업 역시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회 경험이 적은 내가 의욕만 앞섰던 것이 실패를 거듭한 이유였다.

그 무렵 갑자기 정치바람이 불어 고등학교 선배인 서석재 의원을 따라 다녔다. 자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YS 실세로 나중에 총무처 장관도 지내셨다. 정치라는 것이 겉은 화려해 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은 허무하게 막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 나이로 40세가 된 1995년, 내 삶을 조용히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살았지만 이뤄 놓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직장생활도 사업도 정치도 해 보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제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세요. 저 정말 크리스천으로 바르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앞길을 열어 주세요.”

기도를 하면 내가 집안의 반대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미술 쪽을 더 공부하고픈 열망이 솟았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왕이면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난 이미 두 아이를 둔 집안의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동안 아내가 직장생활을 계속해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 유학을 간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미국의 체계적인 선진교육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두 어금니를 꽉 다물고 이 사실을 아내에게 털어 놓았다. 그러나 반대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내가 격려해주며 떠나라는 것이 아닌가.

“여보, 당신이 그토록 열망하는데 새롭게 도전해 보세요. 아이들은 제가 잘 보살필 테니 걱정하지 말구요.” 나는 아내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