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빚 독촉 제한] 채무자 방문 오후 9시 이후 금지·주간에도 사전 통지

입력 2013-12-09 02:38


전 금융권이 이달부터 본격 시행하는 채권추심업무 가이드라인은 기존 공정추심법(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과 신용정보법(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한발 더 나아가 채무자의 권익을 대폭 보호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영국·호주 등의 해외 금지 사례,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민원 사례들이 다양하게 참고됐다. 채권추심행위의 금지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기술한 이 가이드라인은 A4용지 100장 분량에 이른다. 금감원은 대부업계와 채권추심회사 등 제2금융권이 가이드라인을 내규에 반영한 것을 큰 성과로 파악한다. 금감원이 가이드라인 개편을 시사한 지난 8월 이후에도 신용정보 노출이나 제3자를 통한 변제 요구 등 불공정 채권추심 관련 민원은 끊이지 않았다. 양현근 서민금융지원국 선임국장은 “어쩔 수 없이 제2금융권을 찾아가게 된 서민의 고통을 줄이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애들 등하굣길 조심시켜” 이젠 옛말=8일 금감원에 따르면 채권추심 과정은 이달부터 최대한 신사적으로 변하게 된다. “부모에게 채무 사실을 알리기 전에 빨리 빚을 갚아라” “가재도구를 부숴 버리겠다” “아이들 등하교 때 조심하게 하라”는 등의 폭언과 협박이 불가능하다. 채무자를 승용차에 태우고 빠른 속도로 달리거나, 집이나 직장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밖에서 서성이며 공포심을 유발하는 모든 행위도 금지됐다.

대법원 판례를 참고해 야간(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에 채무자를 방문하거나 반복적으로 전화를 거는 행위도 금지됐다. 2005년 대법원은 48일간 채무자에게 460여회 전화를 건 대부업체 직원에 대해 “사회통념상 허용 한도를 벗어난 채권 추심을 했다”며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고 판결했다. 야간을 피해 주간에 방문하더라도 사전에 전화·문자메시지·우편 등을 통해 방문 계획을 알리지 않으면 불공정 채권추심이 된다. 금융회사 직원이 오후 늦게 채무자의 집을 방문했다면 오후 9시 전에 떠나야 한다.

‘돈이 나올 구멍’을 찾아 채무자의 주변을 압박하던 관행도 이제 사라지게 됐다. 가족, 친척, 직장동료 등에게 채무를 변제할 것을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행위가 불공정 추심행위로 명시된 것이다. 양 선임국장은 “이혼한 전 남편, 군대에 간 아들의 가족 등 채무자의 제3자에게까지 변제를 요구한다는 민원이 빈번했다”며 “금융권이 이 부분을 내규에 반영한 것이 가이드라인 작업의 가장 큰 소득”이라고 말했다.

가이드라인은 아주 구체적인 부분에서도 채무자의 부담을 최소화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채무자의 통신비용까지 보호해줄 정도다. 채권추심업자가 발신자 번호만 남기고 통화를 종료하는 것은 ‘통신비용을 채무자에게 부담하는 것’에 해당한다며 금지 사례로 명시됐다. 채무자의 주변인이 채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다. 채무자의 직장에 방문했을 때 채무자가 없다면, 자리에 추심 관련 안내장 등을 게시해 둘 수 없다.

◇채권추심 내부통제 기준 강화=채무자의 권익이 보호된 반면 금융회사들의 자체 내부통제 기준은 한결 강화됐다. 전신주에서 심심찮게 발견되던 ‘떼인 돈’ ‘해결’ 등의 문구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준다는 이유로 광고물 제작 시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채권추심회사가 불법 채권추심 전력이 있는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했다가 적발되면 제재를 받는다.

채무자의 개인정보 보호가 강조된 것도 특징이다. 채권추심업자는 준법서약서에서 “업무상 알게 된 개인정보에 대해 퇴직 이후에도 사적으로 이용하거나 외부에 누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금융회사와 채권추심회사는 직원들이 채무자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국민연금·건강보험·고용보험 등의 인터넷사이트를 차단한다. 추심이 완료되면 채무자의 신용정보를 남김없이 파기해야 한다.

독촉장에 쓸 수 없는 문구도 많아졌다. 채권추심회사가 직접 가압류 등 법적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내용, 미변제 시 형사범죄에 해당된다는 내용 등이 독촉장에 쓰이지 못한다.

모든 금융회사와 채권추심회사는 불법 채권추심 대응 요령을 홈페이지에 공시한다. 신분증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사법당국을 사칭하는 경우, 가족을 포함한 제3자에게 채무사실을 알려주는 경우, 채무를 대납하겠다며 고리의 이자를 요구하는 경우 등은 금융회사 감사부서 신고 대상이 된다.

진삼열 이경원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