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가여운 생명 살려야” vs “아파트 출입 막아야” 압구정동 길고양이 전쟁 1년

입력 2013-12-09 01:41


7일 오후 3시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4동 앞. 고양이 귀 모양의 머리띠를 쓰고 ‘살려주세요’라 적힌 팻말을 든 시민 수십명이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일부 주민들은 눈을 흘기며 지나갔고, 다른 주민들은 애완동물을 데리고 나와 이들을 격려했다. 집값 비싸기로 소문난 강남 한복판 대단지 아파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갈등은 지난해 말 일부 주민이 “길고양이가 거슬린다”며 고양이들이 드나드는 아파트 지하실 출입문을 잠그면서 시작됐다. 반년쯤 뒤인 지난 6월 이 아파트의 한 주민이 지하실에서 바싹 말라 바스러진 고양이 사체 수십구를 발견했다. 갓 태어난 새끼 등 길고양이들이 따뜻한 지하실에 몰려들었다가 문이 잠길 때 나가지 못하고 몇 달간 갇혀 있다 굶어 죽은 것이다.

발견자가 서울시와 강남구청, 동물보호단체 등에 이 사실을 알리면서 이 사건은 길고양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 사이의 충돌로 번졌다. 결국 지하실 출입문에 고양이들이 다닐 수 있는 가로·세로 각 30㎝의 통로를 내주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 4일 아파트 주민 몇 명이 “고양이들이 자꾸 울어 시끄럽고 배설물로 냄새가 심하게 난다. 수도관 동파 위험도 있으니 16일 지하실 문을 잠그겠다”고 통보하면서 6개월 만에 다시 갈등이 불거졌다. 동물보호단체 관계자는 “이전에도 일부 주민들이 계속 지하실 출입문을 닫더니 최근에는 고양이 출입통로도 다시 봉쇄했다”며 “올 겨울에도 고양이들이 지하실에서 굶어 죽거나 밖에서 얼어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74동 지하실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고 고양이 통로도 막혀 있었다. 철창으로 된 출입문에는 ‘이곳 고양이들의 먹이는 관리사무소에서 직접 주기로 약속됐으니 절대 철창 안으로 고양이 먹이를 던져주지 말라’는 안내문도 붙어 있었다. 그러나 관리사무소 측은 “먹이를 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지하실로 들어가자 어린아이 몸통만한 배관이 벽을 따라 가로세로로 이어져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귀 끝이 1㎝ 정도 잘린 갈색 고양이 한 마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잘린 귀 끝은 중성화 수술을 받았다는 표식이다.

경비원 B씨는 “배관이 다 연결돼 있어서 지하실 문을 닫아도 고양이들이 배관을 따라 이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동물보호단체들은 “배관 주변 공간은 고양이들이 지나다닐 수 없는 구조”라고 반박했다.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주민들은 이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눈을 피해 다양한 방법을 고안하고 있다. 습식 사료에 건식 사료와 영양제 등을 섞어 경단 형태로 동그랗게 굴려 만든 ‘경단밥’과 비닐봉투에 사료를 넣고 입구를 묶은 뒤 꽁지를 짧게 자른 ‘사료 주머니’ 등이 주로 이용된다.

주민 김모씨는 “일부 강경파 주민들이 밥그릇을 하도 치워서 고양이들이 안전한 장소로 먹이를 물고 갈 수 있게 이런 방법을 쓴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의 다툼 속에 길고양이들은 올 겨울도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글·사진=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