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코리아의 그늘] ‘노가다’ IT 노동자의 눈물

입력 2013-12-07 04:00


‘갑·을’을 넘어 ‘병·정·무·기·경·신’까지 내려간다. 건설업계의 오랜 관행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업계의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 속에서 돈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빠져나간다. 결국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에 위치하는 정보기술(IT) 노동자(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한참 쪼그라든 돈을 쥐게 된다. 불공정 계약과 고강도 노동, 잦은 임금체불은 덤이다.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비약적인 발전 뒤에 형편없이 열악한 삶을 견뎌온 스태프들이 있는 것처럼, ‘IT 강국 코리아’의 이면에는 전근대적인 노동현실에 고통 받는 IT 노동자들이 있다.

우리나라 IT는 하드웨어 분야에 편중돼 소프트웨어 부문은 취약하다. 또 국내 소프트웨어산업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이 주도하는 패키지 소프트웨어(응용 소프트웨어 제품)보다 시스템통합(SI) 분야의 비중이 훨씬 크다. SI는 정부나 기업의 정보시스템을 구축·운영하는 산업을 뜻한다. 이 SI산업 생태계 속에 다단계 하도급 구조라는 눈물겨운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보통 이런 식이다.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이 정보시스템 개발·보수사업을 발주하면 삼성SDS, LG CNS, SK C&C 같은 대기업 IT 자회사가 수주해서 자기네가 인증하는 1차 협력사에 도급을 준다. 그러면 1차 협력사는 다시 일을 쪼개 중소업체에 맡긴다. 이보다 아래 단계의 하도급은 IT 인력파견업체로 이어진다. 이 업체는 유흥업소에 접대여성을 소개하는 ‘보도방’처럼 원청업체에 개발자를 대주기 때문에 ‘IT 보도방’이라고 불린다. 사장 외 상주 직원이 거의 없어 사무실에 정수기만 덩그러니 있는 경우가 많아 ‘정수기 회사’라는 별명도 붙었다. 이들 인력파견업체는 개발자를 보내주면서 중개수수료로 인건비의 10∼20%를 떼 간다.

발주사가 ‘갑’이라면 개발자는 ‘기’ 이하에 해당한다. 이렇게 여러 단계의 하도급을 거치면서 사업대금에서 중개료가 계속 빠져나가기 때문에 원청업체로 파견돼 실제 개발 업무를 하는 IT 노동자는 원청에서 책정한 인건비의 3분의 1 정도만을 받게 된다. 하도급의 중첩에 따라 작업조건도 불리해진다. 사업을 따내려고 무리한 계약조건을 내밀기 때문에 개발자는 야근과 ‘월화수목금금금’ 근무가 일상이 된다. 초과근로수당을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또 인력파견업체 사장이 임금을 체불하고 잠적해 버리면 개발자는 계약구조상 떼인 돈을 받아낼 곳이 없다. 발주사와 ‘을’ 기업은 하도급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다. 계약 상대자에게 정해진 돈만 주면 끝인 것이다.

오래 전부터 다단계 하도급이 문제가 된 건설업에는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이 있지만 IT업계에는 아직 그런 보호 장치가 없어 많은 개발자들이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경력 9년의 한 개발자는 “병 정도까지의 하도급은 괜찮지만 그 밑으로 과도하게 내려가는 것이 문제”라며 “소프트웨어 개발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일감만 따와 개발자를 파견하는 업체들로 새는 돈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지난 10월 하도급 제한을 골자로 한 소프트웨어산업 진흥법 개정안(IT노동자보호법)을 대표 발의한 민주당 장하나 의원은 “기업 노동자 정부 모두 무분별한 하도급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동안 뾰족한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다”고 말했다.

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