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만델라 1918∼2013] 증오를 사랑으로, 박해를 용서로 녹인 ‘세계인의 마디바’
입력 2013-12-07 01:33
‘마디바’는 그렇게 전 세계인의 축복 속에 떠났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과거 민주화 투쟁 기간 옥살이 후유증으로 호흡기 질환에 시달려 왔다. 2011년 이후 입원을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국민들의 염원 속에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위대한 지도자의 생은 여기까지만 허락됐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유머=1990년 2월 11일. 72세의 넬슨 만델라는 27년의 수감생활을 마치면서 역사적 연설을 한다. “당신들의 무기를 바다에 버려라.” 백인들을 향해 무장투쟁을 주장하던 만델라는 용서와 화해를 외쳤다. 그는 자서전에서 “적과 함께 일해라. 그러면 적은 당신의 동반자가 된다”고 적었다.
그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이혼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회고록에서 남편의 성추문과 관련, “만델라가 자신을 가둔 백인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한번 해보겠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만델라가 고단한 삶을 이겨낸 또 다른 힘의 원천은 자신을 낮추는 특유의 유머였다. 만델라는 95년 방한했을 때 “한국은 대단히 아름다운 나라”라면서 “남아공을 줄 테니 한국을 달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만델라를 가장 유머가 풍부한 지도자로 꼽기도 했다.
◇추장 아들로 태어나 투사가 되기까지=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템부족 마을의 추장 아들로 태어났다. 감리교선교학교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은 그는 당시 목표가 “교육받은 흑인으로서 검은 영국인이 되는 것”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포트헤어대를 거쳐 43년 비트바테르스란드대학 법대에 진학하면서 다양한 인종과 사상을 접하며 정치적 열정을 키운다.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참여해 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한 것도 이때였다.
법대 졸업 후 52년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철폐 운동에 뛰어든다. 만델라의 사무실은 흑인들로만 구성된 유일한 곳으로 흑인들이 처음 찾는 곳이자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곳이었다.
56년에는 반역죄로 기소되지만 4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결국 무죄 판결을 받는다. 그 사이 만델라와 ANC에 중대한 전환점이 생긴다. 60년 3월 발생한 ‘샤퍼빌 대학살’ 사건이다. 백인 정권의 차별에 항거하는 샤퍼빌 지역 흑인 주민 69명이 경찰의 총에 사망했다. ANC는 이 무렵 불법단체가 되고 만델라는 지하활동에 나선다. 만델라는 ANC에 ‘사나운 짐승은 맨손으로 피할 수 없다’(아프리카 속담)며 무장 투쟁을 요구했다. 결국 ANC는 무장투쟁을 위해 별도 조직 ‘민족의 창’을 결성한 뒤 만델라를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만델라는 에티오피아에서 6주간 군사 교육을 받은 뒤 62년 8월 5일 귀국길에 오르지만 경찰에 체포된다.
◇오랜 수감 생활과 최초의 흑인 대통령=만델라는 재판정을 자유와 민주주의, 평등을 설파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는 리보니아 법원에서 “모든 사람이 조화롭게 똑같은 기회를 갖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다”며 “그 이상을 위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살고,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64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형번호 ‘46664’의 길고 긴 수감 생활을 시작한다. ANC는 ‘만델라 석방’에 초점을 맞춰 국제적 관심을 끄는 전략을 세운다. 82년 잉글랜드의 축구 성지(聖地)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7만2000명이 모인 가운데 ‘넬슨 만델라에게 자유를’이라는 노래가 울려 퍼진다. 전 세계 수백만명은 TV를 통해 콘서트를 지켜봤다. 대중의 열광은 국제 지도자들을 움직였고 마침내 궁지에 몰린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은 90년 만델라를 석방시킨다. 만델라는 ANC를 합법정당으로 변신시키고 대중 정치가로 나선다. 93년 데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뒤 94년 남아공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민주선거를 통해 만델라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퇴임 후 더 존경받는 지도자로=만델라는 단임 임기를 마치고 9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배회하는 연금실업자가 될 것”이라던 자신의 예상과 달리 그는 퇴임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분쟁 지역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2001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콩고민주공화국과 브룬디 등의 평화협상 중재를 위해 나섰다. 만델라 재단을 세워 어린이보호활동을 펼치는 한편 빈민구제사업 등 사회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86세가 되던 2004년 만델라는 “내가 연락하기 전에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입원 소식 외에는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해마다 7월 18일 생일은 국가 축제를 방불케 했다. 만델라가 머무르던 요하네스버그 자택은 아프리카를 찾는 지도자들의 단골 코스가 됐다. 2009년 유엔은 그의 생일을 ‘넬슨 만델라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맹경환 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