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는 아버지… 응답하라, 교회

입력 2013-12-07 01:29 수정 2013-12-07 14:28


최근 안방극장과 극장가에 ‘아버지 열풍’이 거세다. 예능 프로그램인 MBC ‘아빠! 어디가?’,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최근 개봉한 영화 ‘히어로’ ‘소원’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모두 아버지의 부성애를 다룬다. 그러나 대중에게 소위 잘 먹히는 ‘부성애 코드’라도 현실에선 힘을 잃는다. 경제 불황이 장기화되고 고용 불안이 심화되면서 아버지들이 경제력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문제는 직장뿐 아니라 가정과 교회에서도 아버지가 설 곳이 마땅찮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시절, 고개 숙인 아버지에게 가족들은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며 격려하고 응원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다르다. 직장에 아버지를 뺏겼던 배우자와 자녀들은 은퇴 후 가족에게 군림하려는 아버지가 어색하고 귀찮기만 하다. 헌금 잘 내던 집사·장로였지만 갈 곳 없는 실직자가 돼 보니 교회에서 그다지 할 일이 없다. 어느새 ‘하숙생 남편’ ‘용돈기계’란 말에 깊이 공감되고, 가족과 세상에 불만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불황 속, 정체성을 잃고 흔들리는 아버지들이 갈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회사·가정에서 설 곳 없는 아버지

크리스천인 60대 남성 A씨는 내로라하는 금융기관에서 일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20년 이상 유능한 금융인으로 살아온 그를 우러러봤다. A씨 스스로의 자긍심도 높았다. 높은 연봉에 두둑한 보너스까지…. 가족과 함께한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최고의 아버지라 자부했다. 하지만 화려한 경력은 거기까지였다. 은퇴 후 그는 아내와 아들에게 남편도, 아버지도 아니었다. 그의 지원을 받고 성장한 아들은 독립 후 A씨에게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는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남편의 공백에 힘겨워하던 아내는 은퇴 후 집에 돌아온 A씨를 반기지 않았다. 사소한 것부터 아내와 의견 차이를 보이던 그는 결국 집을 떠나 원룸에서 지내야 했다. A씨는 “번듯한 집과 차를 사 주는 게 가족을 위한 일이라 믿었다”며 “내가 자랑하고 이뤄놓은 성과가 가족에게 이렇게 피해를 줄지 전혀 몰랐다. 너무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A씨는 최근 은퇴가 시작된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자화상이다. 자신을 희생하고 가족을 위한다고 믿었지만 아내와 자녀의 반응은 냉담하다. 직장을 잃어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권위를 잃었는데 가족마저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다. 부부간 갈등이 심각한 경우 이혼서류를 받기도 한다. 이른바 ‘황혼이혼’이다.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은 은퇴 후 분노범죄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제 베이비붐 세대 은퇴자는 사회적 상실감뿐 아니라 가족 간 소외감과도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를 가부장제의 약화와 평생직장·고용보장 신화가 무너진 데서 원인을 찾았다. 이 교수는 “과거엔 돈을 벌어온다는 것만으로도 가정에서 모든 걸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제 불황으로 언제든 직장을 잃을 수 있게 되면서 가부장적 권위가 점차 떨어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베이비붐 세대 아버지일수록 은퇴 후 ‘훈련받은 무능력’(trained incapacity) 현상을 보인다고 했다. 훈련받은 무능력은 미국 경제학자 베블린이 처음 만들어 낸 말로 이제까지 잘 발휘되던 능력이 새로 변하는 상황에서 전혀 힘을 못 쓰고 오히려 무능력과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즉 조직에서 고위직을 지냈던 가장일수록 은행업무, 가족과 대화하는 법 등 일상적인 일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 이 교수는 “일상에 무능력하지만 가족에게만은 권위적 모습을 보이는 게 이 세대 아버지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를 보듬을 수 있는 교회 문화 만들자

직장과 가정에서 상처받은 은퇴한 아버지에게 교회는 어떤 곳일까. 가정사역전문가들은 교회 역시 흔들리는 아버지를 잡아줄 여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교회의 대소사가 여성 중심으로 꾸려져 있어 중년남성이 신앙을 키울 만한 사역조차 제대로 없다는 것이다.

이의수 남성사역연구소장은 은퇴 후 아버지들이 직장과 가정에 이어 교회에서 또 한번 절망을 맛본다고 주장했다. 이 소장은 “한국교회는 그동안 아버지와 남성들의 헌금과 봉사로 성장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퇴직 후 경제적 능력이 없을 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여성 위주의 교회 운영이 은퇴한 아버지에게 소외감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지향적인 한국교회의 목회가 아버지의 교회 참여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생에서 위기감을 느끼는 아버지들을 ‘강도 만난 이웃’으로 보고 교회가 진정한 이웃이 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소장은 “한국교회가 남성과 아버지를 위한 목회적 돌봄 사역과 양육시스템을 적용해 인생길을 잃은 이들에게 영적 내비게이션을 제공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남성을 위한 교회 안 큐티모임, 인생설계학교, 기도모임 활성화가 그 대안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아버지들이 은퇴 후 삶의 방향을 찾도록 체험의 장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장희진 부천YMCA 아버지교실·젊은아빠모임 협력간사는 소모임 등에서 권위적인 가장의 모습을 버리고 생애주기에 맞는 역할을 찾아나가라고 권했다. 장 간사는 “3040 젊은 아버지들은 자녀와 함께 캠핑을 가며 가족과 소통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5070 아버지들은 부부댄스 등을 배운다”며 “최근 젊은 아버지들은 비슷한 연령 대끼리 모여 ‘좋은 아버지·남편 되기’를 논의하는 데 열심이다. 은퇴 후 아버지도 이를 실천한다면 바람직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