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라동철] 대통령지정기록물의 수난

입력 2013-12-07 01:37 수정 2013-12-07 17:20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둘러싼 정치권 공방과 검찰 수사에 대한 한 전문가의 단적인 평가다. 그는 최근 필자와의 통화에서 이번 사태로 대통령지정기록물 제도는 “만신창이가 됐다”고 개탄했다.

검찰이 대화록 실종사건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한 지 한 달이 다 돼 가지만 논란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새로 밝혀진 사실들이 있지만 이를 둘러싼 해석은 분분하고, 그래서 대통령지정기록물을 들춰봐야 했느냐는 비판도 여전하다. 검찰은 지난달 15일 대화록 실종사건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대화록이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되지 않은 걸 확인했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봉하마을로 가져갔다가 국가기록원에 반납한 청와대 통합업무관리시스템 ‘이지원’에서 대화록 수정본을 발견했고 삭제된 초본을 복구했다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대화록이 이관되지 않은 것은 시스템 관리상의 문제이지 의도적인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국정원에 대화록을 보관해 후임 대통령이 참고할 수 있도록 노 전 대통령이 지시한 사실을 근거로 든다. 2007년 10월 대화록 초안에 대한 ‘보고서 의견’을 통해 “이 녹취록은 누가 책임지고 한 자 한 자 정확하게 다듬고, 녹취록만으로 이해하기 어렵거나 오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부분은 각주를 달아서 정확성, 완성도가 높은 대화록으로 정리해 이지원에 올려두기 바란다”고 지시한 것만 봐도 ‘의도적 사초 폐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대화록과 검찰 수사를 통해 확인됐다. 정국을 5개월여 동안 들쑤셨던 ‘NLL 포기 논란’이 허탈한 결말을 맞은 셈이다. 노 전 대통령이 NLL 포기 의사를 갖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대화록을 봐야만 했던 건 아니었다. 정상회담 후 진행된 남북국방장관회담에서 서해 남북공동어로구역 협상에 임한 우리 측 인사들이 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회담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물들은 현 정부 안보라인의 핵심인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당시 국방부 장관), 김관진 국방부 장관(합참의장), 윤병세 외교부 장관(청와대 안보정책수석) 등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침묵했고 NLL 포기 논란은 정국을 화약고로 몰고 가 불필요한 국론분열만 초래한 셈이다.

이런 과정에서 이제 걸음마 단계인 ‘대통령지정기록물 제도’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2007년 제정된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의 취지는 대통령 기록물을 빠짐없이 남겨 후대가 이용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민감한 기록들이 이관하는 대통령의 의도대로 일정기간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지정기록물 관련 규정은 이런 안전장치다. 지정기록물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 의결이나 관할 고등법원장의 영장 발부에 의하지 않고는 15년에서 최장 30년까지 공개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이번 사태로 크게 빛이 바랬다. 대통령지정기록물의 봉인(封印)이 법 시행 7년도 채 안 돼 벌써 4번이나 풀렸기 때문이다. 2008년 봉하마을 이지원 회수 과정에서 검찰이 처음 열어봤고, 그해 12월 쌀직불금 사건 때 여야 합의로, 그리고 이번에 여야 합의와 검찰 수사로 재차 봉인이 풀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임 중의 민감한 기록들이 온전하게 이관되길 기대하긴 어렵다. 대통령지정기록물이 정치적 공세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국가기록원이 외풍에 휘둘리지 않도록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화하는 등의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라동철 사회2부 선임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