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하 칼럼] 끄트머리에서 성탄을 기다리며

입력 2013-12-07 01:48


어느새 2013년 한 해가 저문다. 웬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가. 자기 나이만큼 속도감을 느낀다더니 해마다 그 흐름이 점점 빠르게 느껴진다. 시골에서 땅을 밟고 살면서부터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24절기를 늘 주의 깊게 살펴보게 되었다. 언제 씨앗을 뿌리는지, 언제 가물이 드는지, 신통하게도 하늘의 달력 속에 생생한 지식이 들어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농사의 때를 알기 위해 태양 주기를 24등분해 ‘소한부터 동지까지’ 24절기를 지켰다. 시간의 경계에서 그 시작과 매듭을 이해한다면 참 지혜로운 일이다. 오늘은 큰 눈이 온다는 대설이고 곧 연중 가장 어둠이 깊은 동지가 다가온다. 이제 소한, 대한 등 형제추위가 들이닥쳐 얼음몸살을 겪고 나면 어느덧 입춘가절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절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덧 봄소식이라니 조금은 성급한 마음이 든다. 사실 추운 겨울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진정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겨울 눈꽃에서 봄 향기를 맡는 사람이란 말도 있다. 가장 깊은 추위 속에 빙판을 내딛는 일은 아기의 걸음마 같아서 늘 부담스럽지만 노인들에게 기대하는 봄은 너무 천천히 다가온다. 대부분의 어르신은 국군의 날부터 입은 내복을 어버이날이 지나서야 벗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나이’이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대로 나이를 비교하며 겨우 한 살 어린 나이 때문에도 주눅이 들고, 노인은 노인대로 묵고 쌓인 나이 때문에 부담스러워한다. 요즘 중년의 사람들도 해마다 한 켜 한 켜 두터워지는 나이테를 반가워하지 않는다. 누구든 인생 비만증처럼 느껴 다이어트를 시도하지만 오히려 나이의 부피감을 점점 확인할 뿐이다.

비록 몸은 늙지만 나이마저 늙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람들이 나잇값을 못하고 사는 까닭은 마음이 늙지 않기 때문이다. 내 경우만 하더라도 늘 몸이 마음더러 ‘이젠 나잇값을 하면서 살라’고 채근하고 엄살을 부린다. 그러면 비로소 몸의 나이와 마음 나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시늉을 한다. 마음조차 몸에게 항복하면 그때는 정말 늙은 것이다. 물론 만년청춘이 행복할까. 나이마다 어울리는 삶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예부터 나이 드신 선배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우리 속담에 ‘웬 못된 것이 촌수 높은 것’이라고, 나이가 들면서 ‘척’해야 할 일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른다고. 인사치레 하려면 돈이 들고, 집 밖으로 움직이면 돈이 들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돈이 들고, 남 앞에서 입만 벙긋해도 돈이 드니, 수입 없는 노년에는 웬만하면 존재감 없는 모습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나이가 들수록 ‘끈 떨어진 연’의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귓등으로 들었던 우스개조차 이젠 명심보감처럼 새겨진다.

그러니 하루라도 젊은 오늘부터 미래를 준비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 노년의 위기를 단박에 해결해 줄 ‘불로초(不老草)’는 전혀 없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체력 관리, 취미생활, 친구관계, 부부 간 다정함, 지적 감수성, 부업능력 등 나이들 준비가 요구된다. 흐르는 세월 앞에서 ‘내가 사라지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내 인생의 부피를 채우고, 삶의 자존감을 만들 이유가 있다. 탈무드는 “이제부터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기에 정녕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라고 하지 않던가.

나잇값은 준비하는 만큼 후하다. 인생은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노인을 가리켜 실년(實年)이란 표현도 사용한다. 밭농사도 중요하고, 자식 농사도 소중하지만 가장 중요한 농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생 농사가 아닐까. 세간의 달력 타령을 하는 중에 어느덧 연말연시를 맞는다. 교회의 달력은 이미 대림절을 시작하였다.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는 누구나 기다림이 있다. 무엇보다 가장 어둡고 깊은 시절에 ‘기다림 초’를 차례로 밝히며 성탄을 준비하는 일은 얼마나 놀라운 시간의 신비인가.

성탄은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가는 때이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지낸 고요한 밤은 얼마나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는가. 한해의 끄트머리인 동지 무렵 다가올 아기 예수의 성탄소식이 참 반갑다. 깊은 어둠 속에서 평화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은 단지 노년의 짙은 우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단법인 겨레사랑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