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영성] 자선은 강력한 기도다
입력 2013-12-07 01:52
여러 수도사들이 함께 모여 사는 형태의 공주(共住) 수도원은 주후 323년 이집트의 파코미우스에 의해 시작됐다. 그가 스무살 청년이었을 때 로마 군대에 징집되었고 신병들은 테베 감옥에서 힘든 훈련을 받았다. 어느 날 인근 시민들이 감옥에 찾아와 신병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었다. 파코미우스는 “이 사람들은 우리를 알지도 못하는데 왜 이렇게 친절합니까”라고 물었다. 곁에 있던 사람이 “저 사람들은 기독교인들로 독생자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인데,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하늘과 땅과 사람들을 만드신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답했다.
섬기는 길, 봉사하는 길
그들의 말과 선한 행동에 큰 감동을 받은 파코미우스는 밤새 기도했다. “하나님이시여, 속히 이 감옥에서 나가도록 도와주신다면 저도 일생동안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명을 따라 봉사하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코미우스는 군대 징집에서 풀려났다. 그는 세네세트라는 마을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들, 흑사병에 걸린 주민들을 보살피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3년 후 은둔 수도사가 되었고, 노동을 해서 얻은 수입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 외에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는 서원한 그대로 평생을 봉사하며 살았다.
타벤니시에서 시작된 그의 수도원은 급속도로 확대되어 수도원 9개, 수녀원 2개에 회원은 1만명이 넘었다. 파코미우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길이었고,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형제들을 통해서 가는 길이었다. 자선이 낳은 수도원은 계속해서 자선을 행했다.
4세기 말 아르스노에 지방에 사라피온이 지도하는 한 수도원은 약 1만명의 수도사들이 살았다. 이들은 주로 경작지에서 농사를 돕는 일을 했는데 추수 후에 품삯으로 받은 수입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다. 각자 낸 금액은 12아르타베스의 곡물로 4개월 노동자 임금에 해당됐다. 그 결과 수도원 근처에는 빈곤한 사람이 없게 되었고 잉여분은 알렉산드리아의 빈민들에게 보냈다.
서방 수도원들은 어떤가. 베네딕트(480∼547)가 세운 몬테카지노 수도원의 모범을 따라 대부분 수도원들은 수입의 십일조를 자선에 사용했다. 또 많은 수도원들은 12명 사도들을 존경하는 의미로 12명의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잠자리를 제공했다. 어떤 수도원은 이보다 더했다. 히르사우 수도원은 매일 30명, 엠머란 수도원은 50명, 리퀴에르 수도원은 300명을 먹였다. 클루니 대수도원은 1년 동안 1만7000명의 가난한 자들을 먹였다.
수도원이 자선에 힘쓴 이유는 베네딕트 규칙서 53조항에서 찾을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을 맞아들임에 있어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니,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자들과 나그네들을 환대하는 것은 주님을 환대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자선과 영성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그 자체로 강력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 행위보다 더 나은 것이 자선이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행한 것은 곧 주님께 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잠언에서도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19:17)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선 그 자선을 무엇으로 어떻게 갚아주실까?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은 보장 내용을 밝힌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시 41:1∼3)
자선을 한다고 병에서 면제되진 않지만 치료는 제공된다. 이 말씀에 따르면 자선을 베푸는 것은 일종의 건강보험에 든 것과 같다. 세상적인 보험은 질병과 사고가 발생했을 때 또 고액의 치료비가 필요할 때 이를 보험회사에서 지불함으로 어려움에 처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이다. 물론 평소에 일정한 액수의 보험료를 내야 한다. 위의 시편에는 질병에 대한 위험대비책이 나온다. 이를 필자는 천국보험회사의 건강보험 약관이라고 말하고 싶다. 누가 보험을 들라고 권고하는가. 하나님이시다. 보험료는 어디에 내야 하나. 가난한 자들에게다.
십일조, 치유를 위한 길
크리스천은 어떻게 자선에 참여하는가. 기본적으로는 십일조는 구제 헌금을 포함하고 있다. 3년마다 한 번 레위인,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를 위해 성읍에 저축하라고 하셨다(신 14:28∼29). 십일조의 3분의 1을 자선에 사용해야 성경적인 지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성도들의 치유를 위한 길이다. 107년 경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는 이단자들이 가진 특징 하나가 과부와 고아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스스로 신자라고 자부하지만 실천적 이단자가 교회 안에는 참 많다.
김진하 교수(백석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