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노석철] 두산의 인화정신과 감독경질

입력 2013-12-05 02:34


연강(蓮崗) 박두병은 1930년대 아버지로부터 ‘박승직 상점’을 물려받아 두산그룹을 일궈냈다. 연강은 부친의 가르침을 따라 사람과 인화(人和)를 핵심 가치로 여겼다. 연강은 “반목은 파멸을 가져오고, 화목은 영원한 발전을 의미한다” “재물은 다시 모을 수 있지만 사람의 목숨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직원 건강과 인화를 위해 사내 야구부와 탁구부를 만들어 동대문 포목상들과 친선경기를 가졌다. 조직에 활기가 넘치면서 기업도 쑥쑥 성장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 두산이 OB 베어스를 창단한 것도 이런 인연이 있었다.

두산의 인화정신은 도도하게 이어졌으나 2005년 박용오 전 회장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큰 오점을 남겼다. 당시 두산 2세 형제들이 그토록 분개했던 것도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가족 내 인화가 깨졌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박용성 회장은 염치불구하고 형을 온갖 말로 비난하며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박용오 전 회장이 인화를 깬 대가는 혹독했다.

그럼에도 인화는 두산 저변에 강물처럼 흘러 박용만 회장도 그 맥을 잇고 있다. 박 회장은 지난해 두산의 기업철학을 담은 ‘사람이 미래다’란 두산 광고 카피를 직접 썼다. 인재를 바라보는 두산의 기업철학이 느껴진다.

‘사람이 미래’라더니

장황하게 두산의 경영철학을 되짚는 건 김진욱 감독 경질 미스터리가 여전히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그토록 중시하는 기업에서 계약기간이 1년 남았고, 포스트시즌에서 사상 유례 없는 혈투로 팬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한 감독을 사전 예고 없이 자르는 게 합당한가. 두산 프런트에선 김 감독의 미숙한 선수 기용과 승부근성 부족을 이유로 시즌 내내 쳐낼 기회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예정된 수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게 두산이 늘 강조해 왔던 변화와 혁신인가. 박용곤 명예회장은 1990년대 후반 ‘개구리론’을 내세웠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담그면 살겠다고 튀어나오지만 서서히 가열하면 자신도 모르게 죽는다는 것이다. 변화에 둔감한 기업은 금방 사라진다는 경고였다. 박용만 회장은 1995년 그룹 기조실장에 취임한 이후 혁신을 기획한 주인공이다. OB맥주 매각, 한국중공업·대우종합기계 인수 등도 박 회장 두뇌에서 나왔다는 게 정설이다. 그 때 체질을 바꾸지 않았다면 오늘의 두산은 존재하지 않았다.

혁신 차원이라고 보면 두산 베어스가 2001년 이후 줄곧 ‘가을야구 단골손님’으로 불리면서도 우승을 한번도 못한 게 빌미가 됐을 수 있다. 특히 올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목전에 두고도 내리 세 번을 맥없이 패하자 두산 고위층이 땅을 쳤다는 얘기도 들린다. 1등 기업 삼성을 꺾을 기회를 날려버린 ‘김진욱식 야구’에 염증을 느꼈을 만하다.

개구리론과 두산웨이

두산은 패배 후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란 광고를 신문에 게재했다. 광고 카피를 쓴 이는 박용만 회장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김 감독을 경질했다. 야구를 좋아하는 박 회장의 의중이 반영됐을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지난해 3월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한 박 회장은 베어스를 개혁 대상에 넣어뒀는지 모른다. 올해 거물급 선수들을 ‘갈 테면 가라’는 식으로 내보냈고, 감독까지 매몰차게 내치는 걸 보면 뭔가 작심한 것 같다. 물론 이를 두고 ‘두산 살림이 진짜 어려워서 그런 게 아니냐’는 수군거림도 들린다. 혁신이 아니라 비용 절감을 위한 구조조정이라는 것이다. 박 회장은 취임 후 지난 100년 이상 지탱해 온 두산의 DNA를 찾아내고, 향후 100년 이상 지속 경영을 위한 기업철학 ‘두산 웨이(way)’ 전파에 힘쓰고 있다. 베어스도 두산의 DNA로 무장해야 한다는 얘기일까.

노석철 체육부장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