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크리스천의 공존 현장을 가다] (2) 재일한인 역사의 거울, 동경복음교회는 지금
입력 2013-12-05 02:40
‘미움’은 세월에 묻고… 89년만의 바자회 대성공
관동대학살 이듬해인 1924년. 도쿄 아라카와구의 한 작은 건물에 십자가가 솟았다. 도쿄 미카와시마교회, 지금의 동경복음교회다. 재일 한국인 크리스천들이 숱한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기도와 말씀으로 견뎌온 지 어언 89년. 내년 창립 90주년을 앞두고 교회는 바깥 세상을 향해 마음의 빗장을 걷어냈다. 공존을 위해서다.
지난달 30일 도쿄 아라카와구 히가시닛뽀리의 동경복음교회(주임목사 조호중)에서는 역사적인 이벤트가 펼쳐졌다. 교회 창립 89년 만에 처음으로 ‘지역주민을 위한 바자회’가 열린 것. 한국에서는 수시로 열리는 교회 바자회가 일본 땅의 재일한인교회에서 열리기까지 9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 이유는 뭘까.
“교회가 생길 당시만 해도 이 동네는 아주 못사는 동네였어요. 우리가 중국 사람을 ‘되놈’이라고 비하해서 부르듯이 일본인들은 재일 한국인들을 ‘선인(鮮人)’으로 격하시켜서 불렀어요. 선인들이 다닌다는 이유로 우리 교회가 당한 핍박도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지난 달 28일 동경복음교회에서 만난 김봉천(80·텐마주식회사 회장) 원로 장로는 선친으로부터 전해들은 교회의 ‘아픈’ 역사를 하나 둘 끄집어냈다. 1948년 집사 직분을 받은 그는 형수인 박옥순(90) 권사와 더불어 동경복음교회의 산 증인이다.
김 장로는 전영복 목사 얘기를 먼저 꺼냈다. 1940년 ‘다나카’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인 목사가 6대 목사로 부임했다. 일제강점기 막바지로 치닫던 당시,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핍박은 한반도뿐 아니라 본토에서도 점점 더 가혹해졌다. 당시 한국인들의 고통을 목격한 다나카 목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예 이름을 ‘전영복’으로 바꾸고 담임 목사로 부임해 5년 가까이 섬긴 것이다. 재일 한국인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교회 앞 도로 맞은편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지원을 받고 있는 ‘조선학교’가 30년 전부터 자리 잡고 있다. “한때는 교회 앞 도로가 38선 같았어요. 주일 아침이면 조선학교 사람들이 교회 앞에 분뇨를 뿌리지를 않나, 예배시간에는 확성기로 예배를 방해했어요. ‘미 제국주의자들의 똘마니들은 물러가라’고요….” 재일교포들의 북송 문제가 불거질 당시에는 교회 여전도회 회장이 북송되는 바람에 교회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한때 성도가 5∼6명으로 줄 때도 있었지만 재일 한인의 역사와 더불어 교회의 십자가는 꺾이지 않았다.
2009년 말 14대 담임으로 부임한 조 목사는 새로운 실험을 진행 중이다. 현재 출석 교인 120여명 가운데 10% 정도인 일본인 비율을 높여보자는 것. 이를 위해 무엇보다 지역사회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여는데 주력하고 있다.
얼마 전, 조 목사는 ‘38선’을 넘어 조선학교를 찾아가 기부금을 전달했다. 교회로서는 처음으로 감행하는 일이었다. “고맙게 받으시더라고요. ‘서로 간에 마음의 문이 열릴 수 있겠구나’ 확신했습니다.” 조 목사의 말이다.
3년 전부터는 성탄 전야에 지역 주민들, 특히 불신자들을 초청해 성도들과 교제의 시간을 갖고 있다. “일본인 중에는 교회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우리 교회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지역 주민들의 발이 교회 문턱을 넘어서게 해보자는 취지입니다.”
이번에 처음 시도한 바자회도 마찬가지. 행사는 대성공이었다. 당초 2시간 정도로 계획했지만 준비한 음식은 1시간 만에 동이 났다. 올해에 이어 매년 11월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바자회를 열기로 했다고 조 목사는 전했다. 동경복음교회는 지금 새롭게 출발하고 있다. 이웃과 함께.
도쿄(일본)=글·사진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