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성기철] 국민원로회의

입력 2013-12-05 01:41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할 때 국가원로자문회의 규정이 논란을 빚었다. 우여곡절 끝에 헌법 제90조에 반영된 그 조항은 이런 내용이다. “국정의 중요한 사항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국가원로로 구성되는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의장은 직전 대통령이 된다.”

집권 여당이던 민정당이 이 규정을 들고 나오자 야당과 시민단체 등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차기 정부에서 상왕 노릇을 하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실제로 전 대통령이 정치적 후계자인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자문회의 의장을 맡아 국정에 개입하려 했다는 게 정설이다. 단임 대통령을 한 게 아쉬운 상황에서 정치보복의 방패막이로 활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전 대통령은 88년 2월 퇴임과 동시에 자문회의 의장이 됐으나 회의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두 달 만에 물러나야 했다. 동생 전경환씨가 비리 혐의로 구속되면서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거셌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해 4월에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구성되면서 5공 청산 바람이 거세게 불어 11월 백담사로 몸을 숨겨야 했다. 생전에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여러 해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상왕 태종을 꿈꿨는지 모르지만 국가원로자문회의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국가원로자문회의 조항은 그 후 사문화되고 말았다. 후임 대통령들이 아무도 헌법이 규정한 자문회의를 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적(政敵)일 수도 있는 직전 대통령이 자동으로 의장을 맡도록 한 규정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런 점을 감안한 듯 이명박 대통령은 헌법 규정과 무관하게 변형된 자문회의를 운영했다. 2009년 발족한 국민원로회의가 그것이다. 원로 명망가 60여명을 위촉하고 현직 총리와 전직 총리, 원로교수 등 3인이 공동의장을 맡도록 했다.

그런데 정부가 3일 국민원로회의 규정을 폐지해 버렸다.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 때문인지 진한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국민대통합위원회 등이 그 기능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게 폐지 이유라는데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다양한 경험을 한 각계 원로들의 의견을 국정에 반영하는 것은 아무리 많이 해도 나쁘지 않다. 행여라도 박 대통령이 대선 때 가동한 것으로 알려진 원로자문그룹 ‘7인회’에 더 이상 의지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 ‘지당하옵니다’란 말밖에 더 듣겠는가.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