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김수영문학관을 찾아서
입력 2013-12-05 01:40
지난 주말, 서울 방학3동에 들어선 김수영문학관을 둘러보았다. 지난달 23일 개관한 도봉구청의 야심찬 문화공간이기에 관람객으로 북적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아직 홍보가 덜 되어서인지 1시간가량 머무는 동안 관람객은 10여명에 불과했다. 문학관 안내서라 할 팸플릿도 준비되지 않았고 대표 전화번호도 따로 공개되지 않아 인근 지하철 4호선 쌍문역이나 창동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온 사람들이 “찾아오기 힘들었다”라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문학관 관계자는 “일단 개관하는 게 시급했다”면서 “건물이나 내부 사진을 담은 팸플릿을 조만간 제작해 비치해 놓을 것”이라고 다소 볼멘 목소리로 설명을 하긴 했다. 하지만 첫술에 배 부를 리 없음을 감안하면 이런 불만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내 경우엔 일단 문학관에 발을 들여놓자 옷깃을 여밀 만큼 숙연해졌는데, 그건 김수영 사후 45년 만에 조성된 문학관이라는 감회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 숙연은 문학관에 마련된 다양한 전시 콘텐츠에서 기인한 것이다. 김수영의 육필 원고와 생애를 담은 비디오 상영실이 마련된 1층 전시실에서 가장 눈에 띈 콘텐츠는 김수영의 작품에서 추출한 단어들을 적은 나무판들을 비치해 놓고 관람객들이 자발적으로 벽에 붙이게 하는 ‘시작’ 코너였다. 누군가 ‘혁명은’이란 단어를 골라 벽에 붙이자 다음 관람객이 ‘가슴에’를, 그리고 약 2분 뒤엔 한 여고생이 ‘영원히’를 나란히 붙여 놓았다. 그 단어들의 조합인 ‘혁명은 가슴에 영원히’라는 문장은 우연의 산물일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게 관람객 대부분은 김수영 마니아일 거라는 짐작 때문이다. 백발성성한 70대부터 여고생까지 이들의 눈동자는 전시물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며 반짝이고 있었는데 40대 후반의 한 여성이 “김수영은 감성의 혁명가였구나”라고 읊조린 것은 첫 시집의 표제작이 된 ‘달나라의 작란’이라는 육필 시 원고 앞에서였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機) 벽화(壁畵)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과 사명(使命)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에 따르면 김수영은 시에 시적으로 된 말을 모은 것이 아니라 모든 말이 시적 힘을 지니도록 시를 썼으며, 이 점에서 그는 자유시의 이상을 실천했다. 그에게 와서 시적인 말과 일반적인 말의 차이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김수영은 시의 성공을 위해 전전긍긍하던 그 시대의 시인들과는 전혀 다른 시인이었다. 그는 시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한 마리 푸른 늑대였다. 전업시인으로 살면서 양계장을 했으나 그것으로 입에 풀칠을 하지 않는 그런 늑대. 채소밭을 일궜지만 농사꾼은 되지 않은 자존감은 그를 일찌감치 정서의 전통에서 멀어지게 했다. 김수영에게는 적어도 시를 잘 써야겠다는 강박이 없었다. 그는 정서의 불온성과 반항과 모험을 후배 문인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유산이라고 했으니 한마디 덧붙이자면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 여사와 여동생인 김수명 여사가 남편과 오빠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유적을 기증해 세운 게 이 문학관이니 만큼 이제 그들의 수중에 남은 유고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이렇듯 세상 속으로 죄다 아낌없이 줌으로써 다시 그들은 더 큰 의미의 유산을 갖게 된 셈이다.
두 사람 모두 문학관 운영위원회에 끼지 않은 것도 그런 의미에서다. 간섭하면 문학관이 잘 굴러갈 리 없다. 김현경 여사의 집에 갔을 때 보았던 집필실 의자며 테이블이, 그리고 김수명 여사의 집에서 보았던 사진이며 유고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게 안도감이 드는 한편으로 숙연해지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김수영문학관이 문학을 통해 불온한 자유를 꿈꾸는 모더니스트들의 산실이 되어 더욱 창대해지길 기대한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