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흥행킹’ 송강호 그 힘의 원천은
입력 2013-12-05 02:49
웃기고도 슬픈… ‘천의 얼굴’
올해 극장가는 배우 송강호(46) 때문에 들썩였다. 출연작 ‘설국열차’와 ‘관상’이 동원한 관객은 무려 1800여만명. 여기에 주연을 맡은 화제작 ‘변호인’(18일 개봉)까지 대기 중이니 2013년 영화계는 ‘송강호의 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변호인’까지 전작들처럼 크게 히트한다면 올해 그는 한 해에만 2000만명을 훌쩍 넘는 관객을 동원한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흥행 스코어보다 더 높게 평가되는 건 작품 속 그의 존재감이다. 송강호가 출연하면 때론 범작으로 그쳤을 작품도 수작으로 거듭난다. 상대 배우의 연기까지 돋보이게 만드는 능력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 작품을 고르는 안목도 탁월해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흥행에 실패한 적은 있지만 왜 이런 영화에 출연했는지 의문이 드는 작품은 거의 없다. 도대체 이러한 송강호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송강호 연기세계의 진경(珍景)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은 송강호 시대=송강호는 연극배우 출신이다. 경남 김해가 고향인 그는 24세이던 1991년 극단 연우무대에 입단해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스크린에 진출한 건 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출연하면서부터다. 그는 이듬해 ‘초록물고기’ ‘넘버 3’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고, 후속작인 ‘조용한 가족’에서 명불허전의 코믹 연기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모습은 시작에 불과했다. 2000년 ‘반칙왕’ ‘공동경비구역 JSA’로 ‘주연 배우’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그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해 다채로운 연기를 펼쳐보였다.
흥행에서도 굉장한 파괴력을 보여줬다. 4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2003년 ‘살인의 추억’을 시작으로 최근 10년간 송강호가 출연한 작품 12편이 동원한 관객 수는 총 5734만521명에 달한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그의 영화를 한 번 이상 봤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출연작들이 보여준 수준도 상당하다. 2000년대 한국영화 문제작을 열거하면 그가 출연한 작품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이창동(59) 박찬욱(50) 봉준호(44) 김지운(49) 등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라면 대다수가 한 번 이상 송강호와 호흡을 맞췄다.
‘남극일기’ ‘괴물’ ‘우아한 세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등 영화 4편을 송강호와 함께 한 배우 윤제문(43)은 2011년 기자와 만났을 때 이같이 말했다. “강호 형은 엄청난 배우다. 형이 저한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연극할 때 품었던 열정을 잃어선 안 된다. 쉽게 연기하려고 하지 마라.’”
물론 송강호에게 슬럼프가 없었던 건 아니다. 2011년과 2012년 각각 개봉한 ‘푸른소금’ ‘하울링’은 흥행에 실패했다. 강성률 영화평론가는 “김윤석(45) 하정우(35) 류승룡(43) 등이 두각을 나타내고, 특히 이들 중 (송강호와 색깔이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 김윤석이 송강호의 ‘지분’을 가져가면서 송강호가 주춤했다. 하지만 ‘설국열차’와 ‘관상’을 통해 ‘송강호 시대’가 다시 열렸다”고 말했다.
◇“송강호는 특별하다”=전문가들은 송강호를 한국 최고의 배우로 평가한다. 독보적인 연기력 때문이다. 그의 연기는 작품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연기를 ‘감상’하는 재미까지 느끼게 만든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송강호의 힘’을 설명한다. ①수많은 변종(變種) 연기가 가능해 감독이 원하는 장면을 창의적으로 만들어낸다. ②어떤 역할도 가능한 유일무이한 배우다.
“연기자들 중엔 시키는 것도 못하는 사람이 있고, 시키는 것만 잘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송강호는 매 작품 그 이상의 것을 해낸다. 아울러 인생의 모순과 역설을 얼굴로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사람을 웃길 줄도 알면서 동시에 울게 만드는 실력이 있는 우리 시대의 광대다.”
유지나 영화평론가의 의견도 비슷했다. 그는 “송강호는 아픔과 유머를 동시에 품고 있는 이중성의 매력이 있다”며 “평범하면서도 뭔가 부족하고 억압돼 있는 듯한 느낌의 인물을 많이 맡았는데, 이런 배역을 매번 깊이 있고 아프게 그려냈다”고 호평했다.
자신이 맡은 배역에 가장 완벽하게 녹아드는 연기자라는 평가도 있었다. 영화를 볼 때면 ‘송강호’는 보이지 않고 작품 속 캐릭터만 두드러지게 만드는 비범한 재주를 가졌다는 것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자기 색깔이 분명한 연기자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송강호’라는 인물은 잊게 된다. 그가 맡은 배역에만 100%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평가했다. 곽영진 영화평론가는 “캐릭터의 본질을 자기 안에 내면화시켜버리는 능력을 가졌다”며 “그 결정적인 예가 ‘관상’이다. 극중 송강호가 공포에 질렸을 때 표정을 보면 얼굴 색조까지 달라진다”고 말했다.
◇송강호가 보여준 최고의 연기는?=국민일보는 영화 평론가 10명을 상대로 송강호의 연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묻는 설문을 진행했다. 각 2편씩 추천받아 순위를 매겼는데, 설문 결과 1위를 차지한 작품은 2000년대 최고의 한국영화로 자주 거론되는 ‘살인의 추억’(5표)이었다.
“1980년대 우리 사회를 관통한 허탈감, 그 자체를 연기에 담아냈다. 누군가를 치열하게 쫓았지만 결국엔 (범인을 못 잡아) ‘무(無)의 세계’를 마주하는 형사 역을 통해 80년대 이미지를 표현해냈다”(심영섭) “송강호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살인의 추억’은 영화의 색깔이 달라졌을 것이다”(강유정)….
특이한 건 설문 결과에서 2위를 차지한 작품이 송강호가 사실상 조연으로 출연한 ‘밀양’(4표)이라는 점이다. ‘밀양’은 주인공 역을 열연한 전도연(40)에게 프랑스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으로 송강호는 여주인공 뒤를 묵묵히 돕는 카센터 사장 역을 맡았다.
“‘밀양’에서 송강호는 한국 배우사(史)에서 예를 찾기 힘든 연기를 보여줬다. 정상의 자리에 있는 배우가 자신을 숨기고 주인공을 빛나게 만드는 상생(相生)의 연기를 펼쳤다. 이런 연기를 한 사람은 (홍콩 배우인) 고(故) 장궈룽(장국영·張國榮) 밖에 없다. 최고 수준의 연기다.”(전찬일)
“완벽한 주연보다 더 힘든 건 완벽한 조연이 되는 거다. 송강호는 그걸 해냈다.”(조원희)
이 밖에 ‘배우 송강호’의 시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넘버 3’(3표)를 꼽는 이들도 있었다. ‘반칙왕’ ‘복수는 나의 것’ ‘우아한 세계’(이상 각 2표씩) 등도 송강호의 연기세계를 언급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작품으로 언급됐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