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도 너무 베끼네… 지상파 아닌 ‘복사파’
입력 2013-12-05 01:32
이상하다. 분명히 새로운 메뉴라고 했는데 어디선가 먹어본 느낌이다. 다른 식당에 가도 마찬가지다. 같은 재료를 비슷한 레시피로 우려먹으면서도 맛집 광고에만 혈안이 된 지상파 예능의 현주소다. 너나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베끼고 짜깁기를 하는 바람에 이제는 누가 원조인지도 헷갈릴 정도. 표절에 대한 도덕 불감증이 위험 수위에 달했다는 비판과 함께 지상파가 아니라 ‘복사파’라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여기도 키우고 저기도 키우고=일요일 오후 5시 브라운관은 흡사 어린이집 풍경이다. MBC ‘일밤-아빠! 어디가?’와 KBS ‘해피 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 모두 아버지가 자녀를 돌본다. 아이들 연령대만 다를 뿐 육아에 고군분투하는 아버지들의 모습은 매한가지다. 2000년 그룹 지오디(god)를 일약 스타덤에 올릴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MBC ‘목표달성! 토요일-지오디의 육아일기’ 콘셉트를 시청률 부진에 허덕이고 있던 ‘일밤’이 올해 1월 다시 끄집어냈고, 11월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재탕하는 모양새다. 내년 1월에는 손녀들을 돌보는 SBS ‘오! 마이 베이비’도 예정돼 있다.
육아가 식상해 다른 채널로 돌려도 신선함은 영 떨어진다.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동시간대 방송 중인 SBS ‘일요일이 좋다-서바이벌 오디션 K팝스타 시즌 3’는 케이블 채널 Mnet ‘슈퍼스타K’ 이후 MBC ‘위대한 탄생’ 등 우후죽순으로 쏟아진 오디션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의 막내 격이다. 보아(본명 권보아·27) 대신 유희열(42)로 심사위원을 바꾸고 우수한 참가자를 모았다지만 앞선 시즌들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 시청률은 오디션 서바이벌에 지친 시청자들의 피로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난 9월 첫 방송한 KBS ‘엄마가 있는 풍경-마마도’는 아예 표절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다. 케이블 채널 tvN이 지난 7월부터 방송한 ‘꽃보다 할배’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을 당시 편성했기 때문이다. 두 프로그램은 출연하는 노배우들의 성별을 제외하면 차이점을 찾기 힘들다. 경찰 예능을 표방하며 KBS가 3일 내놓은 ‘근무중 이상무’와 소방관을 소재로 삼은 SBS ‘심장이 뛴다’도 MBC ‘일밤-진짜 사나이’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MBC가 내달 방송 예정인 ‘와일드 패밀리’는 반려동물을 다뤘다는 점에서 벌써부터 KBS ‘슈퍼독’과 비교당하고 있다.
◇대박은 못 치더라도 망하면 안 된다=지상파 예능의 베끼기 관행은 해묵은 논란거리다. MBC ‘무한도전’이 여러 멤버가 나오는 리얼 버라이어티 붐을 일으키자, KBS ‘해피 선데이-1박2일’과 SBS ‘일요일이 좋다-패밀리가 떴다’가 연이어 등장했다. KBS ‘불후의 명곡’은 가수들의 사전 인터뷰와 대기실 토크, 심사점수를 통한 탈락 시스템 등이 MBC ‘일밤-나는 가수다’와 흡사했다.
과거 지상파 예능이 해외, 특히 일본과 미국 프로그램을 뒤쫓았던 것과는 달리 최근에는 타 지상파나 케이블 채널에서 히트하면 곧바로 따라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제작진들은 저마다 차이점을 강조하지만 핵심 DNA가 유사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다. 한 케이블채널 관계자는 “‘짝퉁’이라는 빈축을 사면서도 비슷한 기획을 내놓는 이유는 대박은 못 치더라도 망하면 안 된다는 심리 때문”이라며 “제작비가 오르다보니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유행을 답습한 후발 주자 때문에 오히려 원조가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다. 역대 시즌 최저 시청률로 막을 내린 ‘슈퍼스타K 5’는 오디션 서바이벌 홍수에 질린 시청자들이 외면해 희생양이 됐다는 동정론이 일었다. MBC ‘무릎팍도사’는 강호동이 탈세 의혹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유사한 포맷의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밀려 결국 폐지됐다.
대중문화평론가 김교석씨는 “단기간에 성과를 보여주려고 하는 조급증 때문에 지상파가 실험과 도전 대신 익숙한 유행에 편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사실상 표절에 가까운 지상파 예능이 범람하고 있다”며 “참신한 기획 없이 뻔뻔한 모방을 반복하는 지상파가 반성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조현우 기자 can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