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정한 (2) 3修 학원서 아내와 첫 만남… 결혼후 종교전쟁을
입력 2013-12-05 02:46
고아원을 나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컸을 정도로 부자였다. 그야말로 난 거리에서 밥을 구걸했던 밑바닥 생활에서 상류생활까지 넘나들면서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창시절은 비교적 평범했다. 키는 부쩍 커서 한상 맨 뒷자리가 내 차지였고 호기심과 장난기가 많은 개구쟁이였지만 학교생활은 착실히 했다. 공부도 꽤 잘해 부산 경남 지역에서 수재들이 간다는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나는 미술반에 들어갔다. 상당한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선배들을 보니 매우 부러웠다. 그래서 미대를 가려는 선배들을 따라 야외스케치를 다니고 그림그리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다보니 공부가 점점 처지기 시작했다.
집에 미대에 가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가 호되게 야단만 맞고 포기를 해야 했다. 고3 입시 때 서울의 명문대에 지원했다 보기 좋게 낙방했다. 당시 부산고는 서울대에 매년 150명 정도 입학했는데 공부도 안한 내가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재수를 시작했다. 나름 열심히 해서 학원선생들은 내 실력이 원하는 대학에 충분히 갈 수 있다고 했음에도 또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오기로 삼수를 시작했다. 학원 종합반에 등록했는데 여기서 만난 첫 여자친구가 바로 아내다.
당시 그녀는 우리 반에 들어와 고교 동창과 잡담하다 내게 ‘시끄러우니 나가라’고 무안을 당했었다. 내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해 나중에 만나 사과를 했으나 받아주지 않을 만큼 화가 나 있었다.
그런데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삼수에도 실패하고 낙담해 고교 선배가 운영하던 미술학원에 놀러갔을 때였다. 그녀가 미대 지망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어 악연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러나 난 곧 군 입대를 해야 했고 그녀는 미대에 합격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군에서 매일 편지를 쓰며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갔다.
제대를 하고 다시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선을 보라는 독촉을 받고 있었다. 알고 보니 부산 구포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손녀딸이었다. 내가 결혼하겠다고 나설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뒤늦게 순천향대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했다. 고교 때 괴테의 문학과 철학세계에 심취했던 것이 이 과를 택한 이유였다. 그 사이 여자친구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 시간을 벌어주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전공자가 없었던 디스플레이(Display)를 배운 그녀는 졸업 후 서울 롯데백화점에 특채돼 직장생활을 바로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늦으면 안 되겠다 싶어 적극적인 구혼에 나섰다. 당연히 여자친구 집안에서 극심하게 반대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끈기 하나는 누구나 인정해주는 나였다. 오죽하면 장인어른이 “자네 정말 거머리같이 붙어 떨어질 줄 모르네” 하시면서 고개를 저었을 정도였다.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결혼허락을 받으러 온 나를 피하는 장인을 따라 장독대까지 따라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결국 둘이 그렇게 죽고 못산다니 어쩌겠느냐며 결혼을 승낙해 주셨다.결혼식에 안 오시겠다던 장인어른도 결국 오셔서 축복해 주셨다.사실 이때 우리 집도 내가 학생인데 무슨 결혼이냐며 반대를 하는 바람에 중간에서 애를 먹어야 했다.
우리는 행복한 표정으로 웨딩마치를 울렸다. 그러나 우리 앞에 엄청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연애할 때는 전혀 몰랐는데 결혼 후에 심각한 문제로 불거졌다. 그것은 우리 집이 아주 철저한 불교 집안인 반면 아내는 철저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것이다. 아내와 나는 본격적인 종교전쟁에 돌입하게 됐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