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 아픈 속내 대사로 풀어놓다… 장애여성 연극힐링 프로젝트 ‘마음을 그리다’ 무대
입력 2013-12-04 02:33
특별한 조명도 없이 자작나무 한그루와 의자 하나가 전부인 무대. 배우들은 객석과 무대 뒤쪽의 화장실을 대기실로 사용할 만큼 조건은 열악했다. 하지만 배우들의 열기는 영하로 뚝 떨어진 날씨를 녹일 만큼 뜨거웠다. 지난달 28일 오후 7시 ‘장애여성 연극 힐링 프로젝트- 마음을 그리다’가 공연된 서울 하월곡동 ‘카페 별꼴’은 1시간 동안 들썩였다. 배우들의 춤사위에는 박수가 쏟아졌고, 깨알 같은 연기에는 ‘와’ 탄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가 하면 배우들이 그동안 마음속에 쟁여놓았던 분노를 표출할 때는 관객들도 한껏 긴장해 한숨 소리만 객석을 누볐다.
막이 내리고 뒤풀이 자리에서 만난 배우들 얼굴에는 하나 가득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우리가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빛났다. 연출과 대본구성을 맡은 강진희씨는 “‘마음을 그리다’는 장애여성들이 감정 탐험과 표현을 통해 솔직한 자신을 찾고, 자신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참여연극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했다. 장애인문화예술판 주관으로 3월 21일부터 매주 목요일 진행됐다. 강씨는 “로미오와 줄리엣, 맥베스 등 셰익스피어 연극의 등장인물을 맡아 연기 기초를 익혔고, 대본은 이들이 그동안 살면서 느꼈던 좌절과 고통, 기쁨 등을 바탕으로 공동 작업했다”고 말했다.
사회자를 맡아 무대를 열었던 임은영(40·서울 수서동)씨는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어서 연습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는데 모두 훌륭히 해내 기쁘다”며 활짝 웃었다. 뇌병변 1급으로 전동휠체어에 앉아 등장하고 퇴장했던 그는 장애인문화예술판의 부대표이기도 하다.
‘무한 긍정 금민정’(31·경기 남양주시 도농동)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금씨는 2막 ‘마녀’의 주인공. 그는 “내 얘기를 하려니 무척 힘들었지만 마음속에 품고만 있던 것들을 여러 사람 앞에서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고 했다. 지체 1급, 시각 5급 장애를 가진 금씨는 초등학교 때 아이들에게 끌려가서 맞고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렸던 아픈 기억과 함께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 줬다. 무대에 서면 힘이 솟는다는 금씨는 “앞으로 배우 활동을 계속 하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열정적인 막춤으로 극의 분위기를 이끌었던 최민경(31·서울 묵동)씨는 3막 줄리엣의 주인공. 뇌병변 1급으로 보행이 자유롭지 못하고 발음도 어눌한 편이었지만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와 줄리엣을 멋지게 연기했다.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싶지만 장애 때문에 주춤거리게 되는 최씨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생을 마감할 것 같은 슬픈 예감으로 두려워하는 모습을 열연했다. 최씨도 “감정 잡기가 힘들었지만 하고 싶은 얘기를 하니까 치유가 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최씨는 “장애인이 사회와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욕심을 냈다.
출연자 중 막내인 안혜성(21·서울 필동)씨는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해 박수를 가장 많이 받았다. 안씨는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매력을 선보이는 1막에서 ‘지금 이 순간’, 3막에서 자신이 줄리엣이 아니라며 슬퍼하는 최씨를 바라보며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을 불렀다. 뮤지컬 배우가 꿈이라는 안씨는 “하늘을 나는 느낌”이라고 했다. 지적장애 1급인 안씨는 “지금은 복지관에서 제과 제빵을 배우고 있지만 꼭 뮤지컬 배우가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가장 많은 대사를 멋지게 소화해내 ‘새로운 여배우 탄생’이란 평을 들은 김진옥(55·서울 우면동)씨는 등·퇴장을 휠체어에 앉은 채 남편 김정근(63)씨와 함께 했다. 뇌병변 1급 장애인으로 양손과 왼쪽 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김씨는 19세 때까지 집에 가둬 두고, 화조차 내지 못하게 했던 엄마를 향해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쏟아냈다. 그는 이번 연극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지난달 21일의 마지막 연습을 꼽았다. ‘나만의 삶이 아닌, 이 땅의 모든 장애를 가진 딸들을 위해 전 엄마를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는 대사를 연습하다 울음을 터뜨렸던 것. 여러 사회활동으로 늘 바쁘게 지내는 그는 “엄마를 향한 미움이 다 사그라진 줄 알았는데 그 응어리가 남았었나 보다”면서 미소 지었다. 김씨는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장애여성들이라면 꼭 연극에 도전해보라”고 권했다.
강씨는 “모두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자신의 문제를 바라볼 힘이 생겼을 것”이라면서 한 사람씩 힘주어 끌어안았다. 출연 배우들은 “꼭 다시 만나자”고 입을 모았지만 강씨와 진행을 맡았던 최은정씨는 쉽게 답을 못했다. 최씨는 “예산 확보가 쉽지 않아서 아직 잘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번 무대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서울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