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 아들 신좌섭 서울의대 교수가 쓴 ‘나의 아버지’
입력 2013-12-04 01:38
“아버지 키 작은데도 항상 큰 걸음 흉내 내며 성큼 성큼 걷는 버릇 익혀”
“아버님은 친구 분들이 붙여준 ‘장군’이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키가 작았다. 그런데도 항상 큰 걸음으로 걷던 아버님을 무의식적으로 흉내 내면서 나는 어려서부터 성큼 성큼 크게 걷는 버릇을 익혔다.”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1930∼1969)의 아들 신좌섭(55) 서울의대 교수가 3일 발간된 문학교양지 ‘대산문화’ 2013년 겨울호의 ‘나의 아버지’ 코너에 기고한 내용이다. 신 교수는 “내가 열 살 되던 해인 1969년 4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함께 지낸 시간으로 온전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기간은 대여섯 살 때부터 고작 4, 5년이지만 내 몸과 마음, 삶의 구석구석에는 아직도 아버님의 흔적이 선명하다”고 잊히지 않는 부정(父情)을 회고하고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아버지와 함께 북한산 정상을 올랐던 일이며 아버지의 시 ‘종로 5가’에 등장하는 막노동꾼의 아들임에 틀림없는 ‘낯선 소년’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각인된 나머지 젊은 시절 10여년을 막노동꾼이나 빈민과 더불어 지냈던 일을 차분하게 돌아보는 신 교수는 자신이 의대에 진학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들려주고 있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아버님은 나의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아버님의 전집은 금서였고 외할아버님의 성함(일제강점기 농촌경제학자 인정식)은 거론조차 하지 못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소위 ‘보이지 않는 연좌제’를 피하기 위해 나는 인문학이나 사회학 대신 ‘6·25전쟁 때도 남에서든 북에서든 살아남았던 의사’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에 다시 역사학과 교육학을 전공한 것도 아버지의 시에서처럼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우는 일에 대한 기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4∼5년 전부터 라오스, 캄보디아 등 여러 개발도상국의 인적자원을 개발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역시 60년대 한국과 아버님에 대한 기억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70∼80년대엔 여전히 반체제 시인 취급을 받던 아버지는 2003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 올 5월 충남 부여에 신동엽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이 같은 변화 때문인가? 돌아가신 후 30여년 동안 꿈에서 자주 뵙던 아버님을 최근 10여년 동안은 통 뵐 수가 없다. 꿈에 나타나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이제 편히 쉬시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에서 만나는’ 그런 통일의 길은 아직 멀기만 한데….”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