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용신] 사랑 많은 남편

입력 2013-12-04 01:30


방한 3종 세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장갑, 모자, 목도리. 내복, 털부츠, 패딩점퍼. 김장, 연탄, 온수매트 등등. 그런데 한 청취자가 이 목록에 기모 고무장갑을 더한다. 세상에 고무장갑에도 기모가 있을 줄이야. 기모 바지와 기모 티셔츠, 기모 스타킹 없이 겨울을 나지 못하는 기모 제품과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도 기모 고무장갑은 며칠 전 그날 처음 들어봤다. 사진 찍어 보내준 청취자들이 엄청 많았던 걸 보면 나만 몰랐던 것인가도 싶고. 기모 공법은 섬유를 긁어 부풀리는 것이다. 그 보푸라기를 기모라고 부르는데 기모 사이에 공기층이 생기면 따뜻해지는 특성이 있어 얇은 옷을 여러 벌 입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난다는 것이다.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했더니 기모 처리를 한 제품이 안 한 것보다 3도의 보온성을 더 확보했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사실 내가 궁금한 건 기모 공법이 뭔지도 아니고, 실제로 따뜻한가도 아니고, 어떤 제품이 있는가도 아니고, 단지 기모를 고무장갑 속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최초로 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하는 점이다. 예전에 디자인을 주제로 열린 강연회 사회를 보는데, 어떤 디자이너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부인이 파우더 뚜껑을 열지 않고 그냥 거울을 봤으면 좋겠다는 말에 거울을 겉 표면에 붙이고 밀어서 열리는 슬라이더 파우더를 디자인했는데 엄청난 반응을 얻어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을 의식했을 땐 아무에게도 만족스러운 디자인을 못 주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한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좋은 것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모든 디자인의 동기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던가.

언젠가 책에서 본 기억이 난다. 일회용 반창고가 나온 것도 집안일에 서툰 아내를 위해서였고, 재봉틀도 바느질로 살림을 꾸려가는 아내가 안쓰러워 남편이 고민하다 발명한 것이라고. 고무장갑도 간호사인 아내가 수술 전에 독한 소독제로 손을 씻어 피부염으로 고생할까봐 의사였던 남편이 만들어준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미끌거리는 고무장갑에 오톨도톨한 돌기모양을 붙이게 된 것도 설거지하다 미끄러워 접시를 깨뜨린 아내를 위해 남편이 발명한 거라는데, 그렇다면 기모 고무장갑은 누가 처음 발명해낸 것일까? 온수 비용 아끼려는 알뜰한 아내가 걱정스러웠던, 또는 추운 겨울 입김 호호 불며 김장 담그는 아내가 안쓰러웠던, 어느 사랑 많은 남편이 아니었을까?

김용신(CBS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