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정한 (1) 동냥밥 고아원생을 美 대학교수로 이끄신 힘은?
입력 2013-12-04 01:41
내가 근무하는 미국 뉴저지 주립대 스탁튼(stockton)대학의 가을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단풍 옷으로 바꿔 입은 나무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캠퍼스 벤치에 조용히 앉으면 상쾌한 숲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돌아가는 사계절의 순리와 아름다운 자연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창조섭리를 확증시키는 증거임에 분명하다. 이 ‘하나님의 섭리’는 57년간 살아온 나의 삶에도 고스란히 역사해 주셨다.
그러나 이 진리를 깨닫고 알기까지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인내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내의 눈물 어린 기도’가 자리하고 있다. 참으로 오래 참으시고,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사실 내 삶은 조금도 대단하지 않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의지와 믿음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크리스천일 뿐이다. 그럼에도 간증 연재에 용기를 낸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분의 세밀하게 일하심을 함께 나누길 원하기 때문이다.
난 어릴 때부터 남들이 겪지 않았던 일을 많이 겪었다. 이제는 조심스럽게 아내와 자녀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용들을 털어놓으려 한다. 그것은 창피하고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라 시대적 아픔에 고통당했던 한 소년이 이제 바른 사회인으로 성장해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귀결되길 원한다.
나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가난했다. 당시 복잡했던 가족사의 이유도 있었지만 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대구희망원에 맡겨져 2년 동안을 지냈다. 고아원 생활을 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면 마음 한구석에 휑하니 아픈 상처가 되살아난다. 그리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어지는 영상이 있다.
당시 고아원 본관 건물은 시멘트로 대충 지은 듯 허름했고 듬성듬성 칠한 페인트칠도 벗겨져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곳에서 드세고 폭력적인 아이들 틈에서 생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여러분은 모를 것이다. 그들 모두가 부모를 잃거나 버림받은, 상처 입은 아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이 상처를 다른 아이들에게 다시 상처를 줌으로써 스스로의 자존감을 세우려 했던 기억이 난다.
한 번씩 코가 큰 외국인들이나 털옷을 입고 화장을 진하게 한 귀부인들이 고아원을 찾아 올 때면 ‘땡땡땡’ 종소리가 울렸다. 이때 우리는 원장 방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찾아 온 손님들에게 우리를 보여주는 순서였던 것이다.
워낙 빈궁했던 때라 고아원에서도 쌀이 떨어질 때가 많았다. 이때 우리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동냥밥을 얻으러 나갔다. 바가지에 얻은 밥이 겨울엔 꽁꽁 얼어 고아원에서 다시 녹여 먹어야 했다. 어느 날은 아침에 먹으려고 밥을 베개 밑에 잘 숨겨 놓았는데 밤사이 다른 아이가 훔쳐 먹어 버려 슬퍼했던 기억도 난다.
어느 날, 짐을 들고 밖으로 나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아마 운영이 어려워 우리를 다른 고아원에 보내려 했거나 해외입양을 시키려 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우리는 대절한 합승버스 2대에 나누어 떠나려 했는데 내가 탄 버스가 고장나 잠시 지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 군복을 입은 우리 집안 친척 형이 나를 극적으로 데리러 왔다.
만약 떠나버린 첫 합승버스에 내가 탔더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가끔 혼자 생각해 보는 부분이다.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형님의 군번(31001877)을 외우고 있다. 나를 구해준 고마운 은인이기 때문이다.
◇약력=1957년 대구 출생, 1996년 40세에 도미, 시튼홀 대학 및 펜실베이니아대학원 졸업, 컬럼비아대학 미술교육학과 박사 과정 졸업, 필라델피아 시청 벽화작업, 미국 7회·한국 2회 개인전시회, 현 뉴저지 스탁튼대학 미술대 교수, 미국법인 3E 인베스트먼트사 대표. 저서 ‘뉴욕의 거지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