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박길성] 타협하고 절충해야 한다
입력 2013-12-03 01:33
“내부에서의 논의는 다양할수록 좋고, 합리적 온건론이 주도하도록 해야”
과거를 공부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이다. 지난 일을 뒤적이는 까닭은 막힐 대로 막히고, 막힌 채로 겹겹이 쌓여만 가는 오늘의 난제를 풀어보기 위한 단초를 찾기 위함이다. 시간과의 경쟁에서 해법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하여 5년, 10년 전 한국사회 모습으로 잠시 되돌아가 본다.
2003년, 2008년, 2013년.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첫해이다. 노무현정부, 이명박정부, 박근혜정부. 그리고 12월은 새 정부 집권 1년을 평가하고 앞으로의 4년에 대한 청사진을 예단하는 시기이다.
“대타협으로 대치정국 풀어라” “국회 정상화해야 한다” “민생과 국정이 기다린다” “대통령의 오기정치 반성해야” “예산안부터 처리하라” “경색 정국 대화로 풀어야”. 2003년 12월 첫째 주 우리나라 주요 일간 신문의 굵직한 사설 제목들이다.
“다수결도 타협도 없는 최악의 반민생 국회” “막가는 민주당, 얼빠진 한나라당” “예산안 통과 정기국회 회기에 끝내라”. 2008년 12월 첫째 주에 등장한 주요 일간 신문의 사설 제목들이다. 급기야는 “이런 국회의원이 국민의 대표입니까”의 질타성 강한 사설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2013년 12월 이번 주의 사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아니 토씨 하나 바꾸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인다. 시간의 추를 5년 전이나 10년 전으로 돌려놓아도 한국 정치의 본질에 관한 한 어떤 차이도 찾아낼 수 없다.
역사란 반복된다는 엄중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반복의 의미가 한국 정치만큼 피폐로 다가오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정권도 바뀌고, 국정지표도 바뀌고, 집권 주도세력도 바뀌고, 지배 이념도 바뀌었지만 거칠게 낙후한 한국정치의 경로의존은 흔들림 없이 견고하기만 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올해도 헌법에 규정된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은 지나갔다. 대한민국 헌법 54조 2항에 의하면 국회는 예산안을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국회 의결 절차를 마쳐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국회가 또 한 번의 중대한 집단 범법을 한 셈이다. 입만 열면 법과 원칙을 강조하고 헌법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창하는 국회가 자신들에 관해서는 헌법 가치를 헌신짝 버리듯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초헌법기관 아니면 탈헌법기관인 셈이다.
이런 일이 어제오늘만이 아니고 지난 십수년 동안 벌어진 연중행사인지라 내성이 붙을 만큼 붙어 별다른 법의식조차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법을 만드는 국회가 법의 권위를 스스로 무시하고 거스르며 정쟁으로 소일하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현 정국은 국회를 해산시켜야 하는 상황이라는 전직 국무총리의 준엄한 질책이 나오는 근본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으로 우려스러운 것은 크고 작은 정치적 쟁점을 법원이나 헌재와 같은 사법기관에 의탁하여 해소하려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다. 정치의 생명인 정치 경쟁이나 정치 과정이 일률적으로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자율적 조정 능력을 상실한 한국 정치의 모습이다.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정치 무능을 넘어 정치 실종을 의미하며 종국에는 정치 무용론으로 이어진다.
정치에는 반드시 상대방이 있게 마련이다. 진리는 외길이 아니며, 현실정치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해법은 타협하고 절충하는 것이다. 서구의 복지국가, 정당정치 모두 타협과 절충의 산물이다.
역사란 때로는 한없이 모질기도 하고 때로는 한없이 너그럽기도 하다. 모진 역사를 너그러운 역사로 만드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책임이자 책무이다. 너그러운 역사를 만드는 최고 가치이자 최대 상식은 타협하고 절충하는 것이다. 방안은 첫째, 여당이든 야당이든 내부에서의 논의는 다양할수록 좋다. 둘째, 그러나 타협 정치의 길은 합리적인 온건론이 주도해야 한다. 셋째, 그리고 절대로 상대방을 가르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 대타협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박길성 (고려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