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국제 NGO ‘팍스로마나’ 前 사무총장 곽은경씨 “갈등과 재난 현장에서 하나님 임재 체험”

입력 2013-12-02 01:28


곽은경(52)씨는 편안해 보였다. 난민촌으로, 빈민가로, 반란군이 있는 밀림으로 20여년 동안 때론 생명을 걸고 뛰어다니던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사진을 찍을 때에도 배경이 된 소나무와 잘 어울려 보였다.

그녀는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NGO 팍스로마나의 사무총장이었다. 하지만 인터라켄의 숲속을 거닐면서도 지리산을 생각하고 파리의 식당에서도 치즈와 바게트 빵보다는 삼겹살을 더 그리워했다고 한다. 25년만에 현직에서 물러나 잠시 한국을 찾은 그녀를 만났다.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작은 변화, 그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곽씨는 갈등과 재난의 현장에서도 신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고백했다. NGO활동을 하다보면 하나님이 왜 고통을 허락하는지, 불의한 상황에는 왜 개입하지 않는지 회의감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위기 속에서 기꺼이 자신을 내놓는 사람, 낯선 이에게도 웃으며 인사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고 답했다.

이런 긍정적인 에너지가 오늘까지 지치지 않고 세계의 구석진 곳을 찾아다니며 남을 위해 일해 온 원동력인 듯 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사에서 일하던 그녀는 20대 중반이었던 1987년 프랑스 파리의 팍스로마나 아시아대표로 NGO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도 때론 답답함을 넘어 분노를 느꼈던 일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2004년 동남아의 쓰나미 재난 때 NGO들마다 너무 많은 성금이 들어왔잖아요. 도움이 필요한 곳은 여전히 많은데도 NGO에선 남은 돈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관리할까, 사용기한을 더 늘리면 안될까 논의하는데 더 신경을 쓰더라구요. 위기 현장에 간 국제기구의 사람들이 몸을 사리고 오히려 우리에게 호위까지 요청할 때는 저도 굉장히 열 받았죠.”

곽씨는 자신의 경험을 담아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라는 책을 지난달 출간했다. 극한의 경험을 적나라하게 소개했지만, 젊은이들이 궁금해 할만한 국제기구와 NGO에 들어가는 방법은 적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NGO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비행기 타고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는 것이 멋지잖아요’하는 이들도 있어요. 사실 NGO가 하는 일과는 거리가 있어요. NGO가 감당해야 하는 본연의 사명,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더 촉구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NGO란 무엇일까.

“문화의 경계선에 서서 활동하는 것이 NGO입니다. 한 사회, 하나의 틀 속에서만 문제를 바라보게 되면 ‘우리만이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요. 경계를 넘나들다보면 우리가 가진 것이 상대적으로 보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정치폭력을 막기 위해 활동할 때, 부유한 백인 마을보다 가난한 흑인 마을에서 더 풍성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유럽과 다름없는 백인 사회와 200년은 더 뒤쳐진 흑인 사회를 오가며 풍요와 인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어요. 그런 경험 속에서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고 도전하고 질문하는 것이 NGO입니다.”

그는 현재의 세계가 갈등이 폭발하는 곳이라고 진단했다.

“인도에서 수천 년 동안 신분 차별을 감수해 왔던 달리트들이 지금은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어떤 분들은 왜 지금에 와서 그러느냐고 하는데 거꾸로 보면 수천 년 동안 축적됐던 갈등이 이제 분출하는 거죠. 1980년대만 해도 전 세계에 분쟁지역으로 분류되던 곳이 17개 나라 뿐이었는데, 지금은 50개 나라가 넘습니다. 세계화로 지구촌 곳곳에서 다문화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요. 미디어가 발달하고 인권 의식이 보편화되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아랍의 봄 사태에서 보듯이 이런 분노를 함께 분출하기는 훨씬 쉬워졌지요. 해결책을 찾지 못하니 폭력적으로 과격하게 표현되고 그래서 갈등이 더 증폭됩니다.”

NGO의 역할도 더 커질 것이라고 곽씨는 내다봤다.

“NGO의 형태도 계속 바뀝니다. 80년대부터 NGO가 사회변화 요인으로 꼽히기 시작했고, 지금은 국가간 외교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정부와 시장이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NGO들이 발굴해 해결책을 모색하게 될 겁니다. 정부의 정책에서도 소외된 이들에게 세심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며 정부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국제적인 캠페인을 벌이는 등 활동 폭이 넓어지고 있어요.”

‘국제인권 컨설턴트’라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그녀는 이제 정부도 NGO와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첨예한 갈등의 현장일수록 신앙적 배경을 지닌 NGO의 정보가 가장 신뢰할 수 있다고 선진국의 정부들은 인정하고 있어요. 제네바에서도 캐나다나 스위스의 외교관들은 저희와 정기적으로 만나 현장 상황을 파악합니다. 반면 후진국일수록 외교관들이 NGO들을 귀찮아하고 선심 쓰듯이 만나줍니다. 정부와 NGO는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건강한 파트너십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책에서 한국의 NGO에서도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지만,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한국사회와 한국의 부족한 사회복지 제도 때문에 망설였다고 밝혔다. 지금 받는 월급도 많은 돈은 아니지만, 선진국의 복지제도 때문에 큰 문제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곽씨는 “한국에서 NGO를 한다는 것은 거의 살인적인 자기희생이 담보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며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 있긴 하겠지만, 사회가 긍정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이런 문제들은) 반드시 해결돼야 한다”고 밝혔다.

국제NGO에서 활동하면서 본 한국NGO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외국의 활동가들과 비교해보아도 아주 우수해요. 하지만 젊은이들이 창의력과 열정을 펴기에는 아직도 위계질서가 좀 엄격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자주 바뀌더라구요. 특히 선진국에선 갈등 상황에 뛰어들어 문제 해결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정치적인 NGO들을 사회가 더 주목하는데, 한국에선 반대로 자선활동을 하는 NGO들은 따뜻하게 바라보지만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NGO는 오히려 눈총을 받지요. 그런 점이 많이 다릅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