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소외된 동독 주민 위해 ‘도움과 연대’ 적극 호소
입력 2013-12-02 01:34
독일 기독교, 통일 이후에도 사회 화학적 결합 앞장
독일 교회는 통일 후에도 사회·문화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사회적 약자와 소외받고 억압받는 시민들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일은 통일 직후 동·서독 주민 간 극심한 사회 갈등이 일어났다. 동·서독 경제 격차와 서로 다른 문화, 생활습관 등이 주 원인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경제발전이 더뎠던 동독 주민들의 상실감과 실망감이 매우 컸다. 서독 주민들도 통일 후 1인당 소득의 7.5%나 되는 통일세가 부과돼 불만이 팽배했다.
독일 연방은행 조사에 따르면 통일 2년 후인 1992년 동독 지역 실업률은 무려 14.8%로 서독 지역(5.8%)의 3배에 달했다. 같은 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동독인의 86%가 2등 국민이라고 느낀다는 응답을 했고, 서독인 중 20%는 베를린 장벽이 다시 세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서독 주민들은 동독 주민들을 ‘게으르고 무능하다’는 뜻인 ‘오시(Ossi)’로 불렀으며, 동독 주민은 ‘잘난 체하고 거만하다’며 서독 주민을 ‘베시(Wessi)’라고 비하했다.
이때 제일 먼저 동·서독 간 내적 통일을 외친 곳이 교회였다. 실제 독일교회협의회(EKD)는 1994년부터 통일 후 소외된 동독 주민들을 위해 ‘도움과 연대’가 필요하다고 각계에 설파했다. 이에 1994∼1996년 각 교회와 정당, 경제단체, 노동조합은 이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며 통일된 독일에서 도움과 연대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 토론 결과를 토대로 EKD는 1997년 ‘연대와 정의 안에서의 미래를 위하여’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이 문건의 내용은 ‘이제 교회가 연대와 정의의 원칙에 따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외된 시민들을 위한 기도회와 촛불집회도 통일 후에 계속됐다. 통일 전 동독 정권의 억압을 비판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열린 기도회가 실업을 해소하고 피폐한 동독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뀐 것이다. 통일 전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 교회에서 ‘평화의 기도회’를 주도했던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는 통일 후에도 기도회를 계속했다. 그는 2005년 라이프치히에서 한 공장의 폐업으로 수천명의 실업자가 발생하자 기도회로 정부를 움직여 폐업을 철회하도록 했다.
과거사 청산에도 교회가 앞장섰다. 개신교 목사 출신인 요아힘 가우크 현 독일 대통령은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옛 동독 문서관리청을 맡아 운영하면서 비밀경찰 조직 슈타지의 무자비한 범죄행위를 폭로하기도 했다.
베를린=모규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