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동독지역 ‘평화의 기도회’ 주도 보네베르거 목사

입력 2013-12-02 02:28


“교회 밖 예배 몰린 인파… 그들이 걷기 시작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지난 10월 29일 크리스토프 보네베르거(70) 목사를 라이프치히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1989년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 교회에서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와 함께 독일 통일의 기폭제 역할을 한 ‘평화의 기도회’를 주도한 인물이다. 보네베르거 목사에게 당시 ‘평화의 기도회’에서 했던 설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그는 곧바로 성경을 펼치고 마태복음 5장 5∼10절을 읊었다. 그리고 가방 속에서 설교 자료를 꺼냈다. 바로 1989년 9월 25일 열린 ‘평화의 기도회’ 때 라이프치히 시민들에게 전했던 성경 말씀과 설교 자료였다. 24년 전 기도회에 참석했던 시민들을 위해 만든 자료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었다. 보네베르거 목사는 “당시 동독 지역에 속한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가슴 답답해했다”면서 “마태복음 5장 5∼10절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항상 우리 옆에 있고, 우리를 보호해주신다’는 말로 이들의 마음을 달랬던 게 기억난다”고 소개했다. 1989년 9월은 동독 국민들에게 희망과 불안감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한 달 전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해 통일의 서막을 알린 반면 한편에서는 여전히 동독 공산 정권의 서슬이 퍼렇게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보네베르거 목사는 1981년 드레스덴에서 목사활동을 하다 1985년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 교회에 와서 ‘평화의 기도회’에 합류했다. 성니콜라이 교회에서 한 ‘평화의 기도회’는 1982년부터 시작됐다.

그는 1989년 10월 9일 ‘평화의 기도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처음으로 거리로 나서며 평화 시위가 이뤄졌을 때의 상황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교회 안은 모여든 시민 3000여명으로 꽉 찼다고 한다. 그래도 밀려드는 인파로 교회 안에 발들일 자리가 없자 1000명 정도가 교회 밖에 모였다. 그는 교회 안에서 평화 예배와 기도가 끝난 후 교회 밖으로 이동해 이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런데 예배를 하는 동안 인파가 8000명으로 불어났다. 그는 “그 많은 인파가 성니콜라이 교회 앞 광장에서부터 라이프치히 중앙역에 이르는 큰 길을 메웠다”면서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바로 평화 기도회가 평화 시위로 바뀐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날 시위를 계기로 평화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정확히 한 달 후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평화의 기도회’ 구성원들은 교인들이 중심이 돼 학생·여성·인권·노동 단체 등도 함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을 가진 것이라는 게 보네베르거 목사의 설명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여러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 기도를 드리는 시간을 갖고 라이프치히에 있었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했다”면서 “여기서 더 확장돼 인권, 사회정의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이야기가 이뤄졌다”고 소개했다.

평화와 자유를 갈망하는 시민들이 계속 교회에 모이자 동독 정부의 탄압도 갈수록 늘어났다고 한다. 인권·노동단체 등의 참여를 막았고, 경찰이 교회 내에 상주해 기도회를 감시하기도 했다. 보네베르거 목사는 “동독 정부가 아예 기도회를 못하도록 교회 지도부에 압력을 넣기도 했고, 나도 기도회에서 손을 떼라는 협박을 받았다”면서 “그래도 자유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찾아오는 시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그를 포함한 목사들은 교회에 찾아오는 시민들도 보호했다. 동독 정부에서 시민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막았지만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기도회를 곳곳에서 열었다고 한다. 그는 “시민들이 모이는 기도회에 반드시 목사 한 명은 참여하게 했다”고 말했다. 동독 정부도 목사를 어떻게 하지 못하는 만큼 기도회에 참석하는 시민들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에게 왜 그때 평화의 기도회를 주도했느냐고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인간의 자유를 사랑하고 부당한 것과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같은 기독교 정신이 독일에서만 국한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평화의 기도회를 주도할 때 모든 시민들이 폭력 없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말하고, 마음껏 여행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꿈꿨다”면서 “이런 기독교 정신은 전체 유럽, 더 나아가 전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라이프치히=글·사진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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