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다] (35·끝) 獨 기독교, 통일의 원동력
입력 2013-12-02 01:32
獨분단됐어도 교회는 하나… 기도로 통일 이끌어
독일 통일 과정에서 교회의 역할은 매우 컸다. ‘평화와 화해’라는 기독교적 가치 아래 교회는 독일 통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교회를 통한 지원은 동·서독 교류의 밑거름이 됐고, 동독에서 열린 ‘평화의 기도회’는 통일의 기폭제가 됐다.
#기독교적 생활과 윤리의식 뿌리내린 동·서독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됐지만 교회는 여전히 하나였다. 독일 전체 지역의 교단들은 독일교회협의회(EKD)를 창설했다. 이후 1949년 동·서독 정부는 나란히 수립됐지만 EKD는 분열되지 않았고 동·서독의 합법적인 기구가 됐다.
동독 정권의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으로 1969년 동독 개신교연맹(BEK)이 창립되면서 독일 기독교도 결국 동독 교계, 서독 교계로 분리됐다. 그럼에도 동·서독 교계는 어느 쪽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쪽 이데올로기의 편을 들지 않았고 끝까지 화해와 평화의 자리에 선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민족 분단의 영구화도 물론 반대했다.
동독이 교회를 막지 못한 것은 수세기 동안 기독교적 생활과 윤리의식이 독일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또 수많은 기독교적 유산이 동독 지역에 산재해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95개 조항 반박문을 내건 곳도 동독 지역인 비텐베르크였다. 동독 교회는 히틀러에게 저항했던 신학자들과 목사들에 의해 재건됐다는 점도 교회가 동독 정부의 저항세력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동독 정부가 갖은 압박을 가해도 교회가 공산당에 굴종할 수 없는 토대였다. 통일 후 1991년 2월 BEK가 EKD에 흡수되는 방식으로 독일 교회는 재통일됐다.
#동·서독 인적·물적 교류의 최전선은 교회
서독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Eins in Christus)’라는 생각으로 이미 1950년대부터 사회 봉사적인 차원에서 동독 교회를 원조했다. 서독 교회는 끊임없이 동독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 양로원, 요양원 등 사회봉사 기관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교회를 통한 사회봉사 지원은 1957년부터 1989년까지 약 14억 달러(약 1조5000억원)였다. 지원 품목들은 동독의 수입 허가를 받았으며 의류, 생필품, 건축자재, 냉장고 등 가전 소비재와 의약품, 서독의 현대식 의료기기 등이었다. 이밖에 교회를 통한 원자재 지원액도 같은 기간 14억 달러나 됐다. 서독 교회는 동독 교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할 때 믿음으로 동독 교회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물품과 돈이 용도에 맞게 제대로 사용됐는지에 대해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동·서독 교회는 또 서로 자매결연을 맺고 분단으로 인한 이질화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동독 교회 건축비용과 건물 보수비용을 모두 서독 교회가 지원했다. 동독 교회 목사들의 월급 중 50%도 서독 교회가 부담했다. 아예 목회활동을 위해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한 목사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다. 서독 출신인 카스너 목사는 1954년 7월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을 교화시키라”는 교회의 명령에 따라 동독 브란덴부르크로 가 목회를 이어갔다.
#격동의 시대 민주화운동의 집결지 역할
동독 교회는 끊임없이 반체제 인사를 보호했다. 또 모순된 동독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BEK 의장 베르너 라이히 주교가 1988년 3월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에게 “교회는 소수의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동독 내 비판적인 사회적 그룹들도 보호한다”고 밝힌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동독 정권은 사회 불만세력을 없애기 위해 비밀경찰인 슈타지를 창설했지만 여기에서도 교회라는 안전장치가 작용했다.
1989년 여름 동독 주민들이 헝가리 국경을 넘어 대량 탈출을 하던 격동의 시기에 동독 주민들은 통일을 염원하며 모두 교회로 몰려들었다.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등 동독 주요 도시에 있는 교회에는 수백만명의 동독 주민이 모여 기도회를 열었다. 그리고 통일과 비폭력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바로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니콜라이 교회였다. 성니콜라이 교회에선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 ‘칼을 쳐서 쟁기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평화의 기도회’를 열었다. 교회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 공산주의자, 반체제 인사 등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1989년 10월 9일 이 평화의 기도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선 것은 통일의 기폭제가 됐다. 슈타지에서 일했던 한 사람은 동독 월요 기도회에 대해 “우리는 모든 것을 대비했지만 기도와 촛불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니콜라이 교회로부터 시작된 동독 주민들의 개혁운동은 여행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경제제도 개혁, 자유 총선거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다. 그리고 그 대규모 시위는 1년 후인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로 그 결실을 맺었다. 물론 시위에서 통일까지 1년 동안 동독 내에서 아무런 폭동이나 유혈사태가 없었던 것도 ‘평화’를 내세운 기독교적 가치의 결과였다.
라이프치히=글·사진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