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교회 주도의 프라이카우프 어떻게 진행됐나

입력 2013-12-02 01:32


교회협 산하 디아코니 ‘물자-정치범’ 교환 전담

서독 정부는 동독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하면서 정치범 석방 및 이산가족 교류 등을 추진했다. 이런 가운데 나온 해법이 바로 프라이카우프였다. 독일어 ‘자유(Freiheit)’와 ‘사다(kaufen)’의 합성어인 프라이카우프는 통일 전 서독이 동독에 현금과 현물을 지불하고 정치범 등을 송환한 방식이다.

서독 교회는 바로 이 프라이카우프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 프라이카우프의 시초는 1962년 서독 신교회가 교회를 통해 3대 트럭분의 칼리비료와 옥수수, 석탄 등을 동독에 공급하고 구금돼 있던 150여명의 동독 교회 관계자들을 석방해 온 것이다. 서독 정부는 이 방법을 이용해 이듬해인 1963년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프라이카우프를 실시했다.

서독 정부는 동독 주민의 인권 개선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프라이카우프를 추진했다. 이런 인권개선 전략의 연장선에서 서독 정부는 내독관계성 차관을 실무 책임자로 해 동독 정치범 석방과 이산가족 재상봉을 추진했다. 이에 반해 동독 정부는 체제에 대한 부정적 영향은 최소화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최대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동·서독 정부의 이 같은 입장의 타협으로 프라이카우프가 실시됐고, 그 연결 통로는 교회가 맡게 됐다.

프라이카우프로 합의된 물자 지원의 실무는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독일교회협의회(EKD) 산하 사회구호복지 기구인 디아코니가 담당했다. 서독 교회가 동독 자치단체를 지원하면서 긴밀한 관계가 형성됐기 때문이었다. 동독 정부도 서독 교회와 동독 자치단체를 오가는 돈과 물품을 그동안 계속 묵인해 왔었다. 디아코니는 석방될 정치범의 수와 물품이 확정되면 서독 내 5개 회사에 위탁해 동독이 원하는 물자를 국제시장 가격으로 구매해 동독에 공급했다. 동독은 물자를 받으면 아무런 제한조건 없이 이를 국제시장에 되팔아 외화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63∼89년 26년간 서독은 서독 교회를 통해 정치범 3만3755명을 송환하고, 25만명의 이산가족을 상봉시켰다. 사용된 금액은 17억3000만 달러(약 1조8400억원)였다. 프라이카우프를 시작할 당시 동독에는 약 1만2000명의 정치범이 투옥돼 있었지만 통일 직전에는 그 수가 2000∼2500명으로 줄어드는 효과도 발생했다.

프라이카우프는 현재 우리 정부도 인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검토하고 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지난 10월 15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의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납북자·국군포로 및 이산가족 문제 해결 방안으로 독일의 프라이카우프 방식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베를린=모규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