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統獨의 또 다른 원동력은 ‘교회’

입력 2013-12-02 01:31


독일 통일에서 교회는 동·서독 교류의 상징이었다. 특히 1989년에는 동독에서 평화 시위를 주도해 통일의 물꼬를 튼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회는 동독 공산정권에 억눌린 주민들을 보호하는 데도 앞장섰다.

지난 10월 29일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니콜라이 교회를 방문했다. 교회 정문에 들어가려는 순간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시민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받아들이고, 보호하겠다는 의미다.

교회 문을 열자마자 나온 복도에는 1980년대 후반 이곳에서 열렸던 평화의 기도회와 평화 시위에 대한 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그중 눈에 띈 것은 1988년 2월 19일 월요일에 열린 평화의 기도회에서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가 시민들에게 들려줬던 설교 자료였다. 퓌러 목사는 ‘동독에서의 삶과 체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자유와 인권이 없는 동독의 현실을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우리는 왜 여행의 자유가 없는가. 이동의 자유가 없는가”라고 묻고 “억압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의지를 동·서독에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퓌러 목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세상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내용의 시편 65장 6∼9절을 읽고 설교를 마쳤다.

전시실을 건너 예배당에 들어서자 벽면에 평화의 기도회 당시 만들어진 포스터들이 눈에 띄었다. 포스터 중 하나에는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기도회가 열린다’ ‘칼을 쳐서 쟁기로’라는 슬로건이 보였다. 비폭력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그와 크리스토프 보네베르거 목사가 주도한 평화의 기도회는 1989년 10월 9일 평화 시위로 연결됐다. 8000여명으로 시작한 평화 시위는 이날 밤 7만명으로 급속히 늘었고, 9일 후인 18일에는 동독을 철권 통치한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이 사임했다. 한 달 후인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앞서 냉전 시기에도 교회는 동·서독 교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957년부터 1989년까지 서독 교회가 동독에 지원한 금액은 무려 28억 달러(약 3조원)나 됐다.

분단 시절 통일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기독교를 억압했던 동독 지도층도 높게 평가했다. 동독 정부 마지막 수장이었던 로타 드 메지에르 전 총리는 “교회는 정치적 반대세력의 보호자인 동시에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의 변호사였으며 비폭력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동독의 혁명과 통일을 완결케 했다”고 말했다.》관련기사 8·9면

라이프치히=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시리즈를 마치며

‘통독(統獨)의 또 다른 원동력은 교회’를 끝으로 ‘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연중 기획기사를 마칩니다. 이 기획은 국민일보 창간 25주년(12월 10일)을 맞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유로존 버팀목으로 성장한 독일의 선(先)경험에서 한국 정치·경제·사회의 발전 모델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습니다. 지난 1년 동안 20여 차례 현지 취재와 국내외 전문가 154명의 자문을 거쳐 3부 44회를 게재했습니다. 여야 국회의원들은 국가 발전을 위한 공부모임 자료로 활용했고, 정부는 복지·교육 분야 등의 정책에 반영했습니다. 이달 중 책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