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신창호] 당위와 현실 사이
입력 2013-12-02 01:35
“당위(當爲)를 위해 현실을 돌보지 않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파멸을 가져온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나오는 말이다. 도시국가시대 이탈리아의 약소국 피렌체에서 외교를 담당했던 마키아벨리는 수많은 정치·외교적 위협이 상존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국가의 실익을 얻어야 하는지를 이 책을 통해 설파했다.
현실보다 당위와 원칙에 치우쳤던 세상의 통치자는 참 많다. 가깝게는 2000년대 초반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다. 부시 전 대통령은 그 유명한 ‘악의 축’ 선언을 통해 각국의 독재자를 몰아내야 한다는 독트린을 실천했다. 부시 이후의 세계는 테러전쟁 시대로 접어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주외교’의 깃발을 세운 뒤 전통적인 한·미동맹 위주의 외교 전략을 중국 쪽으로 바꾸려고 했다. 그의 시도는 그냥 실험에 그쳤다.
공교롭게 서로 정반대 정치 지향을 가졌던 두 사람은 종종 외교무대에서 부딪쳤다. 2003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노 전 대통령이 하나하나 현안을 따지자, ‘대충대충’ 성격의 부시 전 대통령은 “오케이, 맨(OK, man)”이라 역정을 냈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역사의 단편들을 가만 들여다보면 외교만큼 원칙도, 명분도 안 통하는 분야가 없는 듯하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내일이 되면 또 누가 등을 돌릴지 모르는 냉혹한 현실이 수시로 펼치지는 무대다.
얼마 전까지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은 과거사 반성도 할 줄 모르는 ‘철면피 우경화 정부’라는 소리만 주로 들었다. 특히 우리 정부와 중국 정부로부터는 외교무대에서조차 무시당할 정도였다. 그러던 일본이 지난 10월 미·일 전략대화를 계기로 급속하게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동중국해를 경계로 미·중 간 군사적 긴장이 불붙자 미국은 “항상 당신네 편”이라는 사인을 보내는 일본을 보듬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당위’보다는 지금 벌어지는 ‘현실’에서 기인한 선택이다.
얼마 전까지 ‘셧 다운’(연방정부 폐쇄) 사태를 겪을 정도로 국가 재정이 어려운 미국은 극동아시아 방위 전략의 한 축을 형성하는 한국과 일본에 많은 기대를 하는 형편이다. 일본은 이런 미국의 ‘무언의 요구’에 잘 호응하고 있다.
그럼 우리 정부는 어떨까. 한·미동맹이 확고한 기틀을 잡고 있다지만, 미국 입장에선 불만이 꽤나 쌓였을 것이라는 말이 외교가에선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우리가 먼저 요구했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문제를 최근 들어 “되돌리자”고 한 것이나 ‘시진핑 중국’과 급속한 밀착, “과거사 반성 없이 관계개선은 없다”는 대일 원칙주의 외교 등이 그렇다는 것이다.
미국은 우리 정부의 전작권 전환 연기 요청을 ‘첫째는 약속 파기, 둘째는 방위력 부담 증가’로 여기고, 새 정부의 친중 노선에 대해서도 “저러다 한·중동맹이란 신조어가 생겨나는 것 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선이다. 거기다 진전 없는 한·일 관계 문제는 자신들의 ‘아시아 중시정책’ 전체 밑그림을 꼬이게 만든다는 시각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올 초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역학은 더욱 복잡하게 변해가고 있다.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싸고 무력시위까지 서로 불사하는 미국과 중국의 액션을 보면 우리가 챙겨야 할 문제가 북한의 안보 위협만이 아니게 됐다는 뜻이다. 변화무쌍한 현실 속에 박근혜정부의 외교 원칙도 도전에 직면한 셈이다.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