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이옥희 인도 선교사] 작은 물길이 트이면…
입력 2013-12-02 01:34
그저 목숨만 연명해온 달리트들, 한국 방문 후 삶에 생기
잠말라마두구 사람들은 외모가 다른 우리에게 관심이 많았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호기심 어린 인사를 건넸고, 우리의 국적을 물어왔다. 이들은 우리에게 네팔, 동북인도, 일본, 중국, 미국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한국”이라고 대답하면 북한인지, 남한인지를 되물었다.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달리트들은 한국과 한국교회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나마 목회자들이 한국교회 부흥에 대해 알고 있어 백인 선교사처럼 우대는 받지 못해도 선교 동역자로서의 위신은 섰다.
우리가 인도의 시골마을에 와서 시작한 일은 가가호호 방문해 사람들을 만나고 환자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예배하는 일이었다.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그들의 가난과 문맹, 질병, 실업, 차별, 핍박, 조혼 문제의 심각성을 피부로 체험했다. 내 눈에 비친 달리트들의 생활은 한국의 50년대 후반이나 60년대 초반과 비슷했다.
달리트들을 깨워 사람답게 살게 하려면 계몽운동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목회자부터 새벽기도회를 시작해야 했고, 야학을 통해 문맹퇴치운동과 직업훈련을 해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 청년과 청소년 그룹을 조직해 거리 청소를 하고 나무를 심어 환경보존과 함께 부수입도 올리게 해야 했다. 성경 교육을 통해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 카스트 제도를 극복하게 하고 건강한 민주사회를 이뤄갈 수 있는 미래 지도자들을 양육해야 했다.
현실의 벽은 높았다. 만나는 목회자들마다 새벽기도회를 권했으나 한국에서는 가능하지만 인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젊은 목회자들에게 야학을 권했지만 교회는 거룩한 곳이라 세속적인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야학을 위한 별도의 건물 임대와 교사 채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청소년과 청년 조직을 통해 애향심을 배양하고 믿음으로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꾼으로 양육해야 한다고 했지만 더위에 누가 모이겠느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자신들이 처해 있는 빈곤과 차별, 불평등에 대한 불평이 가득했지만 협력과 연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념과 열정이 보이지 않았다. 장구한 역사 속에 불가촉 천민으로 비인간화된 그들은 보다 밝은 미래, 보다 좋은 세상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모진 목숨만 연명해온 것이었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와 철야기도회, 성경공부 등을 인도교회에 접목시켜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일으킬 수 있겠다는 확신과 야학, 직업교육, 인권교육 등으로 인도교회만큼은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은 인도의 문화와 역사, 관습을 무시한 순진한 발상과 관념에 불과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변화를 위한 의지와 열망, 동기 부여가 필요했지만 당시 내게는 흐름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작은 물꼬가 트이는 일이 일어났다.
2000년 가을, 당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고(故) 이중표 목사께서 남인도교단 라열라씨마노회 목회자 여섯 명을 한국으로 초청했다. 그들은 16일간 서울에서 전남 강진까지, 전북 군산에서 경북 영주까지 동서남북을 두루 돌아보았다.
인도 목회자들은 처음에는 한국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무관심한 듯 보였다. 남북으로 갈라진 작은 나라가 무엇을 하겠느냐며 대국의 자존심을 내세웠다. 하지만 전북 전주와 군산 등의 농촌지역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문명화된 농촌의 깨끗한 환경과 기계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에 주목하며 적극적인 자세로 한국교회의 다양한 사회 참여와 봉사, 세계 선교와 국내 선교 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첫 번째 한국 방문팀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던지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새벽기도회와 철야기도회, 구역예배, 청년회, 어린이교회학교, 외국인 노동자센터, 유기농 농가, 과수원, 농수산물 도매시장, 농촌개발원, 종교사학, 광주 망월동 묘지, 체육시설, 노인복지시설 등을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안내했다.
그리고 마지막 감사기도회 및 평가 모임을 가졌다. 인도 목회자들은 새벽예배에서 가장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친절함. 교회와 지역사회에 대한 헌신과 나눔, 섬김에도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이들은 인도에 돌아가 자발적으로 한국을 알리는 민간 외교관이 됐다. 또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와 성도들의 헌신에 대해 간증하며 교회와 목회자들의 변화를 위한 작은 물꼬를 텄다.
작은 물꼬가 인도 안에서도 트였다. 인도에 온 한국교회 단기선교팀이 전도 집회를 통해 물꼬를 트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수많은 팀이 인도에 들어왔다. 그들은 보통 9일 정도의 일정으로 와서 마을을 순회했다. 낮에는 나무를 심고, 염소를 나누고, 청소하고, 벗겨진 페인트를 칠했다. 밤이 되면 뜨겁게 기도하며 전도 집회를 가졌다. 집회의 절정은 환자들을 위한 초청기도였다. 초청기도 시간에 기도 소리가 예배당에 가득 찼으며, 달리트 주민들과 우리 청년들이 서로 끌어안고 하나가 돼 울면서 기도했다. 이 외에도 의료선교팀과 직업훈련팀, 자원봉사팀 등이 들어와 인도 교우들과 목회자들에게 강한 도전을 주었다.
이로써 라열라씨마 지역 교회에 한국과 한국교회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여성 지도자 직업훈련 6회, 청소년 방문 2회, 목회자 방문 11회, 대학원 유학 2명, 학장 초청 4회, 교단 여성대표 2회, 청년 목회자 훈련 1회의 초청이 10여년의 남인도교단 사역 속에서 계속 일어났던 것이다. 무엇보다 인도와 한국 여러 노회의 선교협력 관계가 물길을 더 넓혀주었다.
초청 프로그램에 참석한 대부분의 방문자들이 뜨거운 감동과 강력한 도전을 받고 돌아갔다. 주님의 성령이 인도 목회자들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한국교회로 초청해 그들의 영혼에 불을 질러준 것이다. 특히 3개월 동안 다양한 직업훈련과 한국교회 여신도회 활동을 체험하고 돌아간 10여명의 여성들로부터 많은 열매가 맺혔다.
우리 훈련생이 시작한 띠루넬벨리 제과제빵훈련원으로부터 현재까지 3개 제과점이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10여명의 청각장애인이 취업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장애인을 고용할 계획이다. 나가여꼬일, 깐치뿌람, 다라뿌람, 비하르 지역에서도 여성들의 자립을 위한 교육과 훈련들이 진행됐다.
달리트 목회자들의 한국 방문은 그들의 의식과 목회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새벽기도회와 릴레이 기도, 금식기도 모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목회자들이 모여 기도하면서 응답을 받고 확신을 가지게 되니 성도들 또한 뜨겁게 기도하면서 모이게 됐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성도들이 자신의 헌금으로 교회 건축을 완성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지난해부터는 외국 선교에게 관심을 가지고 훈련 프로그램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받는 데에만 익숙했던 인도교회가 선교사 파송과 나눔을 위해 모금을 하며 바자회를 열고 목적헌금을 실시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많은 인도 목회자와 성도들이 한국교회 방문을 열망한다. 오랫동안 서방국가로의 유학을 선호했던 신학생들이 이제는 유학의 방향을 한국으로 바꾸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계획 속에서 한국교회와 인도교회 사이 물길이 트여 작은 흐름이 시작되었고, 그 흐름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옥희 인도 선교사
● 이옥희 선교사
-1956년, 전북 이리여고·한신대·한신대 신대원 졸업, 1991년 목사 안수
-기장 총회·전서노회 1997년 파송
-기장 총회 파송 남인도교단 선교사(현)
-비전아시아미션 파송 인도선교사(현)
-인도독립교단 실맛신학교 한국 협력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