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세대가 뜬다] 불혹의 ‘칠봉이’ 지갑 열다

입력 2013-11-30 00:10 수정 2013-11-30 04:03


1994년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를 보며 다슬이에게 설레었던 그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사랑스러운 다림이의 모습에 다시 한번 열광했다. 그녀는 늘어진 카세트테이프를 볼펜으로 감아가며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들으며 삶과 문화를 향유했다. 그들의 필수 의상은 일명 ‘떡볶이 코트’로 불렸던 더플 코트였고 필수 가방은 이스트팩이었다.

그들은 최근 케이블 채널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속 주인공들과 입학 동기인 94학번이었다. 2013년 현재 그들은 마흔을 앞둔 기성세대가 됐고 대한민국은 94년의 문화에 열광하고 있다.

극장에선 ‘8월의 크리스마스’를 재개봉했고 런웨이에선 ‘떡볶이 코트’가 패션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강남과 홍대 앞은 클럽 대신 90년대 추억의 가요를 콘셉트로 한 ‘밤과 음악 사이’가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

바야흐로 90년대식 복고가 전성시대를 맞았다. 90년대 복고를 이끄는 것은 70년대생, 90년대 학번에 현재 나이가 30대인 397세대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안정된 경제력을 갖추게 되면서 문화와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서 나아가 소비 주체로 떠올랐다. 이른바 핵심 고객층으로 부상하며 한국 소비 시장의 큰손 역할을 하게 됐다. 신세계백화점은 29일 “올 1∼10월 기준 백화점 전체 매출에서 94세대로 꼽히는 30대 후반(35∼39세)의 소비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14.5%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94세대’의 소비 패턴이다.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소비에 인색하지 않은 것은 물론 자녀를 위한 소비에도 적극적이다. 특히 이들이 가장 많이 구매하는 것은 해외 유명 브랜드를 포함한 일명 ‘럭셔리 부티크’ 제품으로, 전체 94세대 구매품 가운데 1위(12.5%)였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화장품과 스포츠·아웃도어 매출도 각각 7.2%, 5.9%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면서 “이들 제품 역시 94세대가 자신을 위한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통업계는 장기 불황에 주택 마련, 육아 등으로 이들의 소비가 위축된 점도 있지만 자신에 대한 소비에 인색하지 않은 사실상 첫 세대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성장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년층에 국한됐던 ‘7080세대 복고’와 달리 다른 세대로의 확장 가능성도 있다. 94세대 문화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감성을 함께 갖고 있어 당시의 추억을 경험하지 못한 10대와 20대까지 포용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다. 대표적으로 ‘서태지 옷을 입은 빅뱅’이라는 수식어에서 볼 수 있다. 서태지가 즐겨 입었던 보이런던의 비니(모자의 일종)와 티셔츠를 빅뱅의 멤버 지드래곤과 태양이 즐겨 입으면서 나온 말이다. 이 브랜드는 최근 젊은 브랜드로의 변신을 시도해 빅뱅 외에도 f(x), 현아 등 아이돌 가수들이 즐겨 입는 옷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문화평론가인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문화 전공)는 “다양한 개성이 분출되던 90년대 문화는 그 자체로도 매력적인 요소가 많다”면서 “현대의 문화코드와 잘 결합한다면 다양한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업들도 94세대의 문화적 가치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외식업체 등은 앞다퉈 ‘응답하라 1994’ 배우들을 광고 모델로 기용했다. CJ푸드월드는 지난 달 94학번을 대상으로 ‘소셜 다이닝’ 이벤트를 진행했다. 소셜 다이닝이란 공통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서로 모여 식사를 하며 교류하는 문화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