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정치참여 바람직한가] 정교분리 역사
입력 2013-11-29 17:08 수정 2013-11-29 23:07
정교분리는 역사적으로 미국과 프랑스혁명의 산물이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헌법에 정교분리 조항을 명시했다. 종교를 개인의 양심에 따른 선택사항으로 규정하며 국가가 종교 문제에 개입하지 않도록 했다. 청교도들에겐 영국 식민지 시절, 주정부로부터 각종 특혜를 받거나 탄압을 받았던 아픈 기억이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독립에서는 정치와 종교 문제를 합리적으로 수정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미국의 정교분리는 교회의 정치 참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종교 문제 개입을 금지한 조치였다.
프랑스의 정교분리는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공화정은 가톨릭교회가 과도하게 정치에 개입했던 과거와 결별했다. 공화정은 군주정치 부활을 방지하기 위해 힘을 썼고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했다. 이 여파로 프랑스 제3공화정 정부는 1905년 정교분리법을 제정해 톨레랑스(관용)를 표방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몇 개의 관점으로 분류된다. 우선 가톨릭교회와 국가의 개념이다. 4세기 후반 이후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로마 가톨릭의 관점에서 봐야한다. 1000년 이상 로마 가톨릭교회는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을 굴복시킬 만큼 유럽의 삶을 지배했다.
둘째는 루터교적 관점이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정치질서를 포함해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에 거룩한 주권을 행사한다고 봤다. 이 땅에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은 비기독교인뿐 아니라 기독교인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교회와 국가라는 두 왕국을 통해 주권이 행사된다고 판단했다.
셋째는 개혁주의 칼뱅 관점으로 이른바 ‘신정주의’로 표현된다. 칼뱅은 사회 전체를 통합된 실체로 생각했다. 그는 국가의 기독교적 역할을 강조했고 국가의 기능은 기독교인이 기독교적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칼뱅은 실제로 1536년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그런 체제를 세우려고 했다. 칼뱅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정치활동에 대해서는 극단적 상황을 제외하고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으로 봤다.
넷째는 재세례파의 견해로 이들은 국가가 하나님에 의해 설립됐지만 국가는 일차적으로 비기독교인 내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존재하며 그 중요성은 교회보다 떨어진다고 해석했다. 또 하나님이 정치적 직무를 정했지만 기독교인은 그런 위치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봤다.
신상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