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이영미] 길고양이의 자존심

입력 2013-11-28 18:46


문형표 후보자의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이 임박한 듯 보이는 지금, 공교롭게도 전임자 생각이 자꾸 난다. 그의 언행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낯선 것이었는지 새삼스러워서다. 진영 전 복지부 장관은 청와대가 구상한 기초연금 정부안이 ‘내 뜻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관직을 던졌다. 고작 200일 복지부 수장으로 일한 판사 출신 정치인이 연금정책에 대해 품은 소신이란 게 얼마나 대단하겠나. 잠재적 서울시장 후보인 3선 의원이 여의도의 안락한 의원회관으로 돌아간 게 구국의 결단일 리도 없다. 그저 제 생각은 다른 걸요, 차분히 말하고 짐을 꾸린 그 산뜻함이 놀라워서다. 생각이 다를 때 우린 둘 중 하나를 택한다. 무릎 꿇고 참아내거나 돌팔매를 하거나. 진 전 장관은 다른 생각을 감내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박근혜 정부의 적이 되지도 않았다. 순응하지도 싸우지도 않는 길이라니.

그가 떠난 빈자리에 입성하려는 후보자는 인사청문회를 전후로 지난 인생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라 난도질당하고 있다. 아내와 열 살 아들의 생일부터 단골식당과 식습관, 개인카드의 연간 사용액은 물론이고 개인연금 통장 숫자, 몇 년 전 출장길의 동행자 명단에 어느 밤 법인카드로 긁은 40만원의 용처까지 낱낱이 까발려졌다. 그래도 결과는 남는 장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청문회장에서 받은 비난 모멸감 수치심과 장관직의 무게를 달아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최종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심기만 거스르지 않는다면 몇 개 흠결쯤이야 취임 후에는 잊혀질 것이다. 대통령이 마음을 바꾼 징후는 없다. 그러므로 손에 쥘 달콤한 열매를 생각하면 잠시의 모욕은 버틸 만한 것이다.

18세기 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에는 두 가지 인간형이 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싫은 걸 참는 사람과 싫은 걸 피하기 위해서라면 가진 걸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누군들 싫은 일을 하고 싶겠어? 조직의 뜻을 따르는 건 조직원의 의무잖아. 이런 논리를 체화한 이들은 ‘나는 싫어서 할 수 없다’거나 ‘내 생각은 다르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싫다’와 ‘다르다’를 배신과 불온으로 보는 이분법은 평범한 이들의 가정과 일터에서부터 권력의 최상부까지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시국미사를 둘러싼 정치권 논쟁이야말로 이런 논리의 화려한 경연장이다. 대선 부정과 천안함 의혹을 말하는 것만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는 참신한 논리 비약의 바탕에는 다름을 못 견디는 우리 사회의 ‘분열 불안증’이 깔려 있다. 대체 국론이 통일(統一)돼야 한다는 건 누구의 논리인가.

몇 달 전부터 아이 성화에 아파트 지하실 길고양이네에 먹이를 주기 시작했다. 도도함이 고양이들의 매력이라던가. 식사 규칙은 사료 주는 내가 아니라 얻어먹는 고양이들이 정했다. 밥 먹는 데 다가갔다가 털 세운 어미 고양이의 ‘캬악, 캭’ 울음에 몇 번이나 움찔했다. 길이 집인 고양이들은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순간 죽게 돼 있다니 어미의 경계는 생존본능일 터였다. 누군가는 사료를 주고 다른 이는 거기에 생명줄을 걸고 산다. 그건 밥과 권력이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은 어느 곳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대도시 서울의 최하층 거주자 길고양이는 밥 주는 이에게도 끝내 고개 숙이지 않는 자존심으로 아파트라는 야생을 버텨내고 있었다.

다름을 인정받으려면 ‘내 생각은 다르다’거나 ‘그건 절대 싫다’고 고개 젓는 이들이 많아지는 도리밖에 없다. 그러자면 밥줄을 쥔 이에게도 비굴하지 않을 자존심은 절실하다. 길고양이도 포기하지 않는 생명의 저 높고 푸른 자존심 말이다.

이영미 사회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