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경호] 덕수궁 돌담길
입력 2013-11-28 17:40
덕수궁 돌담길에 낙엽이 흩날린다. 낙엽은 언제나 사람의 감성을 자극한다. 매년 이맘때면 돌담길 주변 커피숍과 노점상에선 귀 익은 노래들이 흘러나오곤 했다. 돌담길은 어김없이 낙엽에 얽힌 노래와 가수들의 기억들을 되살려 놓는다.
먼저 고엽(枯葉)을 부른 이브 몽탕. 마르셀 카르네 감독이 1946년 제작한 영화 ‘밤의 문’의 주제곡을 영화배우이자 가수인 그가 영화 속에서 처음 불렀다. 가사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2차 대전 발발 후 나치의 강제노역장에 끌려갔다가 1944년 수용소를 탈출해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를 만났다. 여배우와 결혼한 후 영화촬영하다 메릴린 먼로를 만나 염문을 남겼다. 그래서인지 청년과 중년, 노년에 그가 부른 고엽은 다른 여운을 남긴다.
같은 선율인데 인생역정을 녹여낸 듯 고엽은 부르는 사람마다 다른 맛을 냈다. 사랑과 이별, 고독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다 간 에디트 피아프도 애절하게 고엽을 불렀다. 또 샹송 음유시인이라는 조르주 무스타키, ‘광부의 아들’인 이탈리아계 아다모 역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뿐 아니다. 1967년 11월에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당시 연인들을 울렸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창하다 ‘한국의 프레슬리’로 불렸던 그는 프레슬리 번안곡을 출반하고 1년 후 2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성팬들은 11월이면 돌담길 낙엽을 밟으면서 흐느꼈다 한다. 또 ‘버지니아 울프’를 그렸던 시인 박인환은 1956년 벤치 위 낙엽을 노래한 ‘세월이 가면’을 선보였다. 1주일 후 그 역시 세상을 떴지만 노래는 가수 박인희 목소리에 살아 있다. 가수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는 작곡·작사자 이영훈의 삶을 정동길에 남겨놓았다. 이렇게 돌담길은 가수들의 사랑과 이별, 고독, 슬픔의 기억을 되살려준다. 가수들은 떠났지만 낙엽의 노래는 돌담길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런데 덕수궁 돌담길이 이상해졌다. 1998년 ‘걷고 싶은 길’ 1호로 지정된 이 길이 얼마 전 차량통행 우선으로 바뀌었다. 차·보도 경계 사괴석도 사라진 길에는 차들이 내달린다. 관광버스 행렬이 내뿜는 소음과 매연도 숨 막힌다. 서울시청 별관 앞 돌담길은 시위대 소음으로 늘 소란스럽다
살기 팍팍하다는 요즘엔 낙엽을 밟으며 이브 몽탕과 차중락을 떠올리는 것마저 감정의 사치인가 보다. 낙엽이 쌓인 돌담길의 고즈넉한 정취마저 사라지면 옛 추억은 이제 기록사진전에서나 되살려야 하나.
김경호 논설위원 kyung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