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명희] 대통령이 진짜 용납해선 안 될 것들
입력 2013-11-28 17:39
“신뢰와 원칙의 정치인답게 국정원 대선개입과 권력층 일탈에 단호히 대처해야”
요즘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 구중궁궐에 사는 ‘공주’ 같다. ‘누나’라고 부르는 호위무사들에 둘러싸여 서민들이 사는 진흙탕 세상에는 발을 디디고 싶지 않은가 보다. 바깥 세상에 나올 때는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박 대통령은 한 달 만에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두둔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박창신 원로신부를 향해 “국민의 신뢰를 저하시키고 분열을 야기하는 행위를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일본 침략인지, 진출인지’를 헷갈리는 총리와 여당 의원들이 떼거리로 거들고, 검찰은 ‘종북 딱지’를 붙여 즉각 수사에 나섰다. 5000만명 국민 중 한 명이 비정상적인 발언을 했다고 해서 만사를 제쳐두고 그렇게 분노해야 했을까. 물론 퇴진요구가 마뜩지 않았겠지만.
일국의 대통령이 진짜 용납하지 말아야 할 일들은 그런 것이 아니다. 검찰 수사결과 국가정보원의 대선 관련 트위터글이 121만건이나 추가로 발견됐다는데도 대통령은 침묵했다.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이 수백만건이 됐든, 수천만건이 됐든 박 대통령 말처럼 댓글 덕분에 당선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트위터에 익숙하지 않은, 개중에는 트위터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50대와 60대 이상에서 몰표를 얻었다. 그렇다고 20, 30대 젊은층이 대선 후보들의 선거공약이나 TV 토론보다 국정원 댓글을 보고 박 대통령을 찍었다는 것도 무리다.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은 명백한 위법행위이며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원칙’을 강조하는 평소의 박 대통령 이미지라면 처음부터 국정원을 따끔하게 질타하고 검찰에 엄정한 수사를 지시했어야 옳다. 그랬다면 국정원 사건을 맡았던 권은희 수사과장이나 윤석열 전 특별수사팀장 입에서 외압 폭로도 없었을 테고,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쫓아냈다는 소리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이명박정부보다 더한 낙하산 투하가 이뤄지는 데 대해서도 침묵해선 안 된다. 지난 정부가 낙하산 인사들을 내려 보내자 당선인 신분으로 “전문성이 없는 인사들을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에 내려 보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했던 사람이 박 대통령 아니었던가. 식언을 일삼는 정치판에서 드물게 ‘신뢰의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다져온 대통령이기에 하는 말이다.
‘클린 리더십’을 장점으로 갖는 첫 여성 대통령이기에 권력층의 일탈행위에는 추상같이 분노해야 한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접대’ 의혹에 대한 검찰의 무혐의 처분을 묵과해선 안 된다. ‘그들의 개 같은 행위’로 가족들과 결혼할 남자에게까지 버림을 받았다는 피해여성은 청와대 신문고에 “죽음의 길을 선택하기 전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한을 풀고 싶어 편지를 쓴다”며 “각하는 이 나라의 머리이기 전에 여자다. 범죄 앞에선 협박도 폭력도 권력도 용서되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들 앞에 보여 달라”고 절규했다. 법인카드로 가족 생일날 호텔에서 식사하는 등 6400만원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는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도 마찬가지다. 법을 지키며 묵묵히 살아가는 국민들의 사기를 꺾지 말라.
저잣거리에선 벌써 레임덕이 시작됐다거나 이 정부에 더 기대할 게 없다는 수군거림이 들린다. 왜 대통령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누가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것인가. 제발 궁궐에서 나와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춰라. 1년을 허비했는데 앞으로 4년을 이렇게 보낼 순 없지 않은가.
때마침 독일에서 날아온 소식 하나가 우리를 더 우울하게 한다. 3선 연임에 성공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야당 당사를 직접 찾아가 야당의 핵심공약인 ‘최저임금제’ 당근을 쥐어주며 17시간 마라톤협상 끝에 보수·진보 연립정부 구성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우리에게 메르켈 같은 ‘무티(엄마) 리더십’은 너무 큰 꿈이었나.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