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정지된 멈춤과 그 비명소리… 소설가 한강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입력 2013-11-28 18:34
올해 등단 20년차이자 그동안 여덟 권의 소설 단행본을 출간한 한강(43·사진)이 틈틈이 쓰고 발표한 시들 가운데 60편을 추려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문학과지성사)를 냈다. 누군가는 소설로는 못다 푼 내면이 있어서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한강은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등 5편으로 등단한 시인 출신이다.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소설로 돌아섰지만 그의 시심은 젊은 날의 한 정지된 멈춤과 그 비명소리를 듣는다.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이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니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그때’ 전문)
시의 화자에게 인생은 육박전이며 허깨비와의 싸움일진대 그 상처의 고통을 지속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한 일종의 방법론이 되고 있는 듯 하다. 눈두덩에, 뱃가죽에 푸른 멍이 들면서까지 포기할 수 없는 영혼의 싸움이 그것일 터이다.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이렇게 멎는다/ 기억이/ 예감이/ 나침반이/ 내가/ 나라는 것도”(‘마크 로스코와 나 2’ 부분)
선이 아닌 단지 면으로 이루어진 라트비아 출신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추상화를 마주하고 있는 심정을 한강은 ‘영혼의 피 냄새’라는 느낌으로 그려낸다. 영혼의 내부에도 피가 있어서 피의 번짐만이 상대방의 영혼을 알아보게 한다는 그런 인식은 어디서 온 걸까. 1970년생인 한강은 아마도 같은 해 손목을 칼로 그어 죽은 마크 로스코와 자신이 비슷한 영혼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그동안 한강이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상처받은 영혼들은 이토록 아프고 진실된 말을 건져 올리려고 시를 끼적이고 있었던 한강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