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광기·비극의 시대, 꾸밈없는 평화를 꽃 피우다

입력 2013-11-28 17:15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꽃의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지켰던 사람. “인간도 꽃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 바로 독일 정원의 아버지로 불리는 칼 푀르스터(1874∼1970)다.

숙근초(宿根草) 육종가였던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20세기 정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숙근초는 여러해살이풀을 뜻하는 말로 한국에서 흔히 야생화라고 불리는 꽃들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그의 나이 30대 중반에 이미 꽃들의 아름다움을 간파하고 독일 포츠담 보르님구(區)에 토지를 구해 ‘푀르스터 숙근초 재배 및 육종원’을 설립했다. 그는 정원사로서는 이례적으로 재배원에서 키운 숙근초에 대한 글을 쓰고 강연도 열심히 했다. 한국에서도 뒤늦게 사람들이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주목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식물의 가치와 본질의 아름다움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던 그의 안목과 식견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보르님 정원’으로 불리는 그의 육종원은 지금도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정원으로 남아있다. 당시 유행했던 기하학적 정원 대신 숙근초와 다양한 식물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풍경을 중시했던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1930년대 만들어낸 그 정원 양식을 ‘보르니머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일곱 계절의 정원으로 남은 사람/칼 푀르스터/나무도시

‘일곱 계절의 정원으로 남은 사람’은 그가 생전에 썼던 책 27권과 수백 편의 에세이, 수만 통의 편지 중 정수만을 발췌해 엮은 책이다. 일곱 계절의 정원이란 푀르스터가 계절을 ‘초봄, 봄, 초여름, 한여름, 가을, 늦가을, 그리고 겨울’로 분류했던 데서 따왔다. 꽃은 물론이거니와 억새, 고사리, 수목들을 조합해 초봄부터 늦가을, 그리고 겨울에 이르기까지 늘 피어있고 변화하는 정원을 추구했던 그의 정원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15세 때부터 정원사 교육을 받기 시작해 숨지기 직전인 96세까지 평생 정원을 지키고 꽃을 가꿨던 그의 삶과 기록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그가 평생 일궜던 보르님 정원의 가장 특색 있는 곳은 바로 ‘선큰정원’이다. 한국의 동산과 반대로 땅을 파 들어가 다소 낮은 곳에 정원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계단으로 내려가 주위를 둘러보면 사방이 꽃으로 둘러싸여 있는 듯한, 그야말로 인간도 꽃이 된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에게서 정원사 교육을 받았던 조경가 헤르만 괴리츠는 이렇게 말했다. “푀르스터의 곁에서 일하고 떠난 수많은 젊은이들이 단지 식물에 대한 지식과 사랑만 얻어가지고 나간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기본적인 마음가짐과 평화로운 세계관을 배워가지고 갔다. 이 점은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정원 에세이라기보다 전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꽃을 통해 인생을 들여다보고, 더 나아가 우주를 떠올렸던 푀르스터라는 인간 자체가 가진 매력이 크게 다가온다. 20대에 병을 앓던 중 신을 만나는 신비주의적인 체험을 토대로 독특한 신앙을 평생 유지하고 스무 살 넘게 차이 나는 어린 아내와 나눴던 사랑 이야기까지 하나하나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현대 독일 사회를 관통했던 두 차례 전쟁과 유대인 학살이 개인들의 삶에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까지 엿볼 수 있다.

1943년 8월 27일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은총이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일 겁니다. 삶은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은총으로 가득하다지만 지금은 아무 말이 필요 없는 비극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비극을 미리 예상하여 방지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비극인 것 같습니다. 은총의 강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내 아버지의 정원에서 보낸 일곱 계절/마리안네 푀르스터/나무도시

두 번째 책 ‘내 아버지의 정원에서 보낸 일곱 계절’은 그의 외동딸이자 정원사로 아버지가 남긴 보르님 정원을 지켰던 마리안네가 남긴 정원에 대한 기록이다. 정원을 찾은 이들이 늘 묻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세세히 기록한 것들을 묶었다. 풍부하게 실린 사진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정원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일곱…’을 읽은 뒤 이 책을 집어 든다면 마치 보르님 정원을 구경하는 기분으로 술술 읽을 수 있다. 칼 푀르스터의 재단 이사로, 마리안네와 십여년 넘게 친분을 유지해온 조경학박사 고정희씨가 번역을 맡았다. 저자들은 물론 정원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을 읽기 전에’라는 해제 코너를 추가해 독자들의 책읽기에 수월함을 더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