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11. 역사와 종말 : 시간과 영원] ① 역사와 종말의 만남

입력 2013-11-28 17:24


역사는 ‘창조’에서 시작해 ‘종말’에서 완성 둘 사이를 잇는 현재는 하나님 섭리가 인도

기독교를 성격지우는 중요한 특징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는 기독교가 ‘역사적’이면서 ‘종말론적’이라는 점이다. 왜 이런 특징이 나왔는지를 보고, 그것이 기독교 신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겠다.

선(線)적 사고와 종말의 탄생

인류의 역사를 볼 때 인간의 사고 패턴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간(空間)적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선(線)적인 사고다.

인간은 오랫동안 순환적이고 공간적인 사고를 했다. ‘공간적 사고’는 사계절의 순환, 달의 이지러짐과 참, 식물이 죽고 봄이 되면 다시 소생하는 자연의 이치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인간은 자연과 우주의 일부였고, 신(神)도 자연에 편재하거나 자연의 총체와 동일시되었다. 이런 사고구조에서 인식된 신은 언제나 범신론적 성격을 가진다.

공간적 사고에서 시간은 언제나 양적이고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 어떤 특정 시간이 질적으로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인식이 나올 수 없다. 순환과 반복적 행위 안에서 시간의 의미는 상실된다. 이런 흔적은 인도, 중국, 고대 그리스-로마를 위시해 오래된 문명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성경은 전혀 다른 사고의 구조를 보여준다. ‘신’이 일상적인 평범한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 야훼가 열조에게 현현하고, 모세를 만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났다.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고 시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응답하면서 그들과 함께하셨다. 이스라엘에는 진정 놀라운 경험이었다.

야훼를 체험한 그 시간은 다른 시간과 질적으로 구별됐다. 신을 체험한 시간은 특별한 사건이었기에 시간의 질적인 개념이 생겼다. 시간은 동일하지 않았고 시간의 의미가 달라졌다. 시간 속으로 들어온 신의 현현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원형적 사건이 됐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같은 의미다. 영원이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 ‘신’이 시간을 찢고 들어와 인간이 됐다. 여기서 순환이 멈춘다. 이 지점에서 시간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평범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체험하면서 시간을 연속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시간의 끝인 ‘목적’을 생각하게 했다. 이 목적이 종말이다.

그러므로 창조에서 시간은 시작되고 종말에서 시간은 완성된다. 이제 시작이 있고, 마지막이 있는 선(線)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 즉 성경과 함께 역사의식이 생겨나고, 역사가 완성되는 종말에 대한 인식이 나타났다.

연속성과 비연속성

역사와 종말의 관계를 보자. 역사와 분리된 종말론은 위험하다. 종말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는 종말이 역사와 대립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종말이 오면 역사는 파괴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종말의 때에 현재의 역사가 파국을 맞는다면 역사는 의미가 없다. 기독교인도 역사에 대한 책임성을 가지고 살 필요가 없어진다.

성경을 볼 때 현재의 역사와 다가오는 종말의 관계는 변증법적이다. 이 둘 사이에는 연속성도 있고 비연속성도 있다. 현재 역사가 발전하면 그대로 종말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종말은 현재 역사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다. 이 역사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는 없다. 종말의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며, 거듭난 세계다. 성경은 이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말은 역사를 넘어서는 ‘끊어짐’이 있으며 역사와 종말은 비연속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종말이 현재의 역사를 배제하지 않는다. 종말로 인한 새로운 세계는 현재의 세계를 무시하지 않는다. 종말은 현재의 ‘역사로부터’ 비롯된다. 종말의 세계가 이 세계 외에 다른 세계로부터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역사와 종말은 ‘연결’되어 있으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역사에 대한 책임적 자세가 필요하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역사의식과 종말론적 신앙의 조화에 있다. 종말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미래의 소망을 잃으면서 현재의 역사에 몰입된다. 종말만 강조하면 현재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못하고 역사에 대한 책임성도 상실한다. 종말적 신앙은 이 세상을 이기는 순교의 힘을 주고, 현재 역사에 대한 긍정은 이 세상에 대한 책임성을 준다.

신앙, 시간 위에서 생기를 얻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출발하여 역사의 완성이라는 ‘종말’을 향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잇는 현재의 역사는 하나님의 인도라는 ‘섭리’가 차지한다. 기독교 신앙은 창조론-섭리론-종말론으로 이어지는 큰 구조로 엮어진다. 이 구조 위에 교회와 기독교인의 삶이 있다.

태초에서 종말 사이의 현재 시간이 우리가 사는 시간이다. 이 시간의 연속이 역사이고, 역사는 일정한 방향으로 신의 뜻을 따라 진행된다는 생각이 ‘역사의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섭리하는 시간의 의미를 물으며 살아야 한다. 시간이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구조 위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인식이 기독교적 역사의식이다. 이 구조를 떠나면 기독교의 근간이 흔들린다.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응답할 때 신앙은 구체화된다. 신앙이 역사적 인식 없이 공간적이 될 때 신앙은 모호하거나 흐려진다. 기독교는 삶의 목적과 역사의 완성을 생각하며 사는 종교다. 기독교의 신앙은 공간적, 범신론적, 윤회적, 순환적 성격이 아니다. 선적이며, 역사적이며,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목적지향적이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인식 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진다. 이 때 신앙이 활기를 띤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응답하는 시간적 성격을 가진다. 동시에 역사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며, 지금 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저자연락은 페이스북 facebook.com/dkkim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