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동학·갑오개혁은 어떻게 ‘시민’을 깨웠나
입력 2013-11-28 17:26
시민의 탄생/송호근/민음사
서양의 근대와 달리 한국의 근대는 왜 여전히 흐릿하게 남아 있을까. 한국에서 근대적인 개인과 사회, 국가는 어떻게 출현하고 형성됐던 것인가. 중도보수 성향의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전작 ‘인민의 탄생’에 이어 또 다시 ‘공론장(公論場)’ 분석을 통해 이 질문의 답을 찾아 나섰다.
공론장이란 사회 구성원들이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보편적 이익을 도출해내는 공간을 뜻하는 것으로 독일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정립한 개념이다. 송 교수는 현대 한국 사회의 공론장이 극단적으로 분열되고 훼손된 모습을 보고 그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근대로 돌아가는 학문 여정을 시작했다. 이 여정의 첫 산물로 2011년 내놨던 ‘인민의 탄생’이 끝난 지점에서부터 ‘시민의 탄생’은 출발한다.
송 교수는 1860년대 초에서 1894년 갑오개혁까지 우리가 흔히 ‘개화기’로 부르는 시대를 ‘말안장 시대’로 호명한다. 마주 보는 두 산이 아랫부분에서 맞닿는 모습에 시간을 합성해 ‘저무는 시간과 생성되는 시간이 겹치는 부분’을 의미한다. 그는 이 시기 양반 공론장의 붕괴와 평민 공론장의 급속한 확산이 엇갈리는 모습에 주목한다. 특히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조선시대를 떠받들고 있던 ‘천(天) 사상’을 뒤엎으며 인민의 동요를 불러왔다. 하늘을 인격화하고 ‘지배층의 천이 나의 천이 될 수 있다’며 인민 스스로 천도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는 주체임을 자각시켰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이라 부를 만하다고. 하지만 이 시기, 근대의 표상인 ‘개인’이 탄생했느냐는 질문에 송 교수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도 않다”고 답한다. 자유를 의식한 개인의 내적 요건이 어느 정도 성숙된 것과 달리 이를 본격 발화시킬 외적 조건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어 1882년 12월 고종이 내린 ‘서얼차별금지 윤음(倫音)’에 주목하며 고종의 자강정책으로부터 ‘교양 시민’과 ‘경제 시민’의 원형에 해당하는 집단을 본다. 1880년대 초부터 1894년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청나라에 각각 파견됐던 신사유람단과 영선사 등 젊은 지식인들로부터 근대의 싹을 찾은 것이다. 1894년 갑오개혁은 660개에 달하는 입법안을 쏟아내며 유교적 지식 국가였던 조선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거꾸로 일본 식민 통치에 대한 위기감을 자극하면서 지식인 사회의 공론장을 들끓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송 교수는 1905∼1910년 지식인들의 저술 활동에서 나타난 개념들을 통해 개인, 사회, 국가의 근대적 개념이 정착됐음을 확인한다. 이어 1905년을 기점으로 각종 정치 결사체들이 출현하는 대목에 유의미한 해석을 부여한다. 지식인 공론장에서 어렴풋하게 정립한 ‘사회’ 개념을 실천을 통해 이행시킨 주체가 바로 자발적인 결사체였으며, 자발적 결사체의 존재가 조선이 근대 사회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행기 조선에서 어렵게 태어난 개인과 결사체, 사회는 서양의 시민들이 국가와 대결 구도를 통해 획득했던 시민성을 키워나가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일제의 식민 지배와 마주하게 되면서 국가를 지켜야 하는 역설적인 위치에 처하게 됐다. 송 교수는 “개인에서 시민, 국민으로 발전했던 서양과 달리 조선에서는 국민이 먼저 호명되고 사회와 개인의 실체를 주목하는 경로를 밟았다”면서 “조선의 경로는 근대 이행의 매우 특이한 사례”라고 분석했다. 근대 국가가 어느 정도 성숙한 뒤 국제적 경쟁이 치열해진 제국주의 시대에 국가가 시민에게 국민이란 호칭을 부여했던 서양의 근대적 현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듯 제대로 피워 보지도 못한 채 동굴 속에 갇혀버린 조선의 개인과 사회는 식민 통치하에서 유일하게 열려있던 상상의 공간, 문학의 영역을 통해 ‘상상적 시민’의 삶을 이어나갔다. 송 교수는 거기에서 멈춰버린 시민들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피어났는지 ‘현대 한국 사회의 탄생: 20세기 국가와 시민 사회’(가제)를 통해 계속 추적해갈 계획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탄생을 설명하는 데 유효했던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으로 한국의 근대를 서양의 근대에 비춰보는 방식에 거부감을 갖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흥미로운 연구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렴풋하게 느껴지던 한국의 근대가 조금은 분명하게 다가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