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풍향계-이규영] 벨기에 외교를 본받자
입력 2013-11-27 18:08
“자주와 균형의 원칙을 바탕으로 고슴도치형 실리적 안보외교 모색해야”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바야흐로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축으로 등장하고 있다. 동시에 동북아 지역에서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에 패권 경쟁이 첨예화됨에 따라 한반도는 안보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상황이다. 그 배경은 일차적으로 중국의 부상(浮上)에 기인한다. 중국은 명실상부한 G2의 위상을 바탕으로 미국에 맞서는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를 대내외적으로 강조한다. 미국 역시 지난 10년 동안 ‘테러와의 전쟁’을 뒤로하고 아태 지역에 기존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아시아로 회귀(pivot to Asia)’ 또는 ‘재균형 정책’을 내세우며 중국을 견제하려 한다.
미국은 국방예산 감축 압력으로 일본에 방위비 분담을 요구하는 대신 미·일동맹을 더 강화시키는 정책을 앞세운다. 급기야 2010년부터 중국의 국내총생산이 일본을 추월했다. 이에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하고 초조해진 일본은 미국의 안보외교 노선에 주저하지 않고 동참하면서 집단적 자위권을 강조한다.
동북아 국제질서는 상대적 역학관계로 결정된다. 한국은 안보와 관련해 전통적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를 훼손하면 안 된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한·미 관계보다 미·일 관계를 더 중시한다. 한·중 관계 역시 만만치 않다. 경제발전과 대북한 영향력이라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한·중 간 관계 심화는 미국의 우려를 자아낸다.
한·일 관계는 긴장의 살얼음 위를 걷고 있다. 지난 60여년 동안 대한민국은 치열한 남북대결 상황에서도 국민들의 열정적 노력에 힘입어 세계가 주목하는 국가로 발전했다. 그럼에도 이런 변화 과정에서 한국은 안타깝게도 타국에 변화를 강제하거나 주도할 수 있는 선도적 중심권에 속하지 못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처지다. 남북한 분단과 북한의 끊임없는 대남 위협은 한국의 안보외교 책략을 더욱 어렵게 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다시금 소용돌이치는 불편한 지정학적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어떤 안보외교 책략이 필요한가. 첫째, 국제질서를 주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입장과 처지가 아니라면 변화로부터 야기되는 영향을 최소화시키면서 관련국들이 함부로 경시할 수 없는 책략을 모색해야 한다. 고슴도치식 생존 및 방어 전략이 필요하다. 고슴도치는 공격형이 아니면서도 외부 가시 때문에 쉽게 공격을 받지 않는다. 동시에 자신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시를 세우지 않는 특성을 보인다. 상대적 역학관계가 적용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국의 안보외교 책략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고슴도치형’ 실리외교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둘째, 유럽 대륙의 복잡한 지정학적 상황에서 국가안보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추구하는 벨기에를 주목해야 한다. 경상도 크기의 벨기에는 유럽 강대국들의 각축장 한가운데 있으며 무역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에서도 실리 외교를 펼쳐왔다. 벨기에는 상호 불가침을 도모하던 1925년 독일의 침공으로 로카르노 조약의 무용성을 직접 경험했다. 이후 강요된 경우든 자발적이든 여하간 중립적인 태도는 일종의 국가적 불리함 또는 열세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자주(independence)’와 ‘균형(equilibrium)’의 원칙을 확고부동한 안보외교 책략으로 수립하고 이를 일관되게 추진했다. 이 원칙 하에서 약소국임에도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경제적, 정치적 유럽 통합을 주도적으로 강하게 주창했고 궁극적으로는 ‘유럽연방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나아가 불리한 지정학적 여건을 극복하고자 유럽연합의 제반 국제기구를 유치했다. 이로써 외부로부터 위협과 침공 가능성을 배제하고 항구적 평화를 고착시키는 지혜와 기지를 발휘했다. 한국도 상대적 강국들의 각축 속에서 벨기에처럼 주도력을 신장시키면서 관련 국가들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효과적인 안보외교 책략을 모색해야 한다.
이규영 서강대 교수·국제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