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박강섭] ‘관광지 100선’ 과열 경쟁
입력 2013-11-27 18:08
최근 모 지자체의 문화관광해설사로부터 한국관광공사가 진행하는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00선’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하소연을 들었다. 이유는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해당 지자체의 관광지가 100선에 진입하도록 모든 인맥을 동원해 투표를 하라고 강요에 가까운 부탁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인에게 투표를 권유하다 잡상인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어 자괴감까지 느낀다고 덧붙였다.
100선 투표에 대한 피로감은 담당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혹은 인기 순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순위를 올리기 위해서 친인척과 동문은 물론 출향인사까지 투표에 동원하느라 업무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라고 불만을 표출한다. 실시간으로 인기 순위가 뒤바뀌는 투표라서 기껏 올린 순위가 몇 단계 후퇴라도 하면 단체장이나 상사로부터 질책을 받기 때문에 담당 공무원의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한국관광공사가 진행하는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관광지 100선’은 국내관광에 대한 네티즌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기획됐다. 온라인에서 국내 관광지에 별점을 주면 실시간으로 집계가 돼 1위부터 100위까지 순위가 매겨진다. 관광공사 입장에서는 큰 돈 들이지 않고 국내관광을 홍보할 수 있는 매력적인 홍보수단이지만 과열경쟁으로 지자체의 편법투표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지난 국정감사 때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관광지 100선’이 지자체의 과열경쟁으로 한 사람이 수백회 중복 투표를 하는 바람에 순위가 왜곡됐다는 지적이 있었다. 100선 투표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곳 중 같은 사람이 5회 이상 투표한 비율이 창녕 우포늪 49%, 문경 새재 41%, 여수 거문도와 대구 근대골목이 각각 24%를 차지했다. 완도 청산도에서는 한 사람이 무려 120회나 투표를 하기도 했다.
관광공사는 뒤늦게 동일인이 한 관광지에 투표할 수 있는 기회를 1인 1회로 제한하고 지자체에 중복투표 자제를 요청했다. 중복투표가 불가능해지자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관광지의 순위를 올리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투표를 부탁해야 하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공무원들의 몫이 되었다. 100선 투표는 투표의 4대원칙이 적용되는 선거투표가 아닌 인기투표이다. 하지만 지자체의 과열경쟁으로 일반 네티즌보다 공무원 등 특수관계인의 투표가 상당수를 차지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공정성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1인 1회 투표율이 77%로 비교적 양심적인 투표를 한 수원 화성이 101위를 기록해 순위 밖으로 밀려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국내관광 활성화를 위해 관광지에 꼭 순위를 매겨야 하는지도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한다. 요즘은 초등학교 성적표에도 순위가 나오지 않는다. 하물며 대한민국 구석구석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는데 여기에 순위를 매기면 관광객들의 선입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 결과 쏠림 현상으로 지역관광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실제로 모 지자체는 동원투표를 하지 않은 탓에 잘나가던 관광지가 순위 밖으로 밀려나면서 관광객이 크게 줄었다고 씁쓰레했다.
우리는 몇 해 전 제주도를 세계7대자연경관에 올리기 위해 국제전화료만 부담하면 한 사람이 무제한으로 투표를 하는 희한한 경우를 지켜봤다. 국제사기 논란에도 불구하고 투표를 많이 해야 애향심과 애국심이 강한 사람으로 치부되면서 대통령까지 나서 투표를 하는 촌극을 벌였다. 지난해에는 통합진보당 대리투표로 정치권이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는 말이 있듯이 관광은 인기투표 순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인기투표라 하더라도 순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지자체 입장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편법 투표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다. 비상식의 고리를 끊기 위한 관광공사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