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맞닿은 지상의 보물섬… 뉴칼레도니아의 보석 ‘일데뺑’
입력 2013-11-27 17:08 수정 2013-11-27 22:44
태양이 먼 바다로 내려앉을 무렵, 나는 고운 모래 해변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야자수 잎 사이로 기분 좋은 무역풍이 불어왔다. 카이트 서핑족들이 띄운 커다란 연이 석양 속을 오갔고, 돛을 접은 요트들이 바다 위에 한가로이 떠 있었다. 뉴칼레도니아. 이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나라에 머무는 동안, 나는 늘 쫓기듯 살아온 한국의 일상을 잊었다. 평온하고 무사한 나날들이었다. 무인도의 흰 모래밭에서, 1000년을 살아온 늙은 소나무의 그늘 아래서, 수도 누메아의 프랑스풍 레스토랑에서, 나는 조금씩 생기가 충전됨을 느꼈다. 뉴칼레도니아! 일본의 여류소설가 모리무라 가쓰라가 ‘천국에서 가장 가까운 섬’이라 불렀던 이곳에서 나는 일주일을 보냈다. 다만 흐르는 시간을 잡고 싶었다.
◇소나무와 바다, 갯바위가 선사한 선물 ‘일데뺑’
누메아에서 프로펠러 여객기를 타고 20여분을 날아가자 푸른색 라군(Lagoon·산호로 둘러싸여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속에 자리 잡은 일데뺑이 나타났다. ‘소나무의 섬’이란 뜻이다. 1774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섬을 발견하고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바다에서 섬으로 접근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이 소나무였을 것이다. 지금도 소나무의 조상격인 아로카리아 나무가 해변을 따라 높다랗게 늘어서 있었다. 열대섬과 침엽수림, 이 이채로운 동거는 쥐라기 시대와 비슷한 섬의 토양 성분 덕분이라고 했다. 뉴칼레도니아관광청의 이지수 차장은 “스무 번 넘게 일데뺑에 와 봤지만 질린 적이 한 번 없다”며 “뉴칼레도니아 안에서도 보석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산호 가루로 이뤄진 회색의 해변은 베이비 파우더처럼 고왔다. 맨발로 걸어보니 묽은 밀가루 반죽을 밟는 듯 하다. 우락부락해도 사람 좋은 얼굴을 가진 원주민, 카낙인들이 일행을 지나칠 때마다 번쩍 손을 들어 인사했다. 카낙족은 3000년 이전부터 소나무섬에서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섬의 날씨를 닮아 온화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일데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오로만의 자연풀장으로 갔다. 르메르디앙 일데뺑 호텔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인데, 길이랄 게 따로 없어서 수풀을 헤치며 가다가 앞이 막히면 우회해서 물길을 따라 전진했다. 눈앞이 확 트이며 거대한 비취색 천연 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바다인데 파도는 없고 잔잔한 물결만 이는 바다다. 오로만의 입구를 어깨를 맞댄 갯바위들이 막아서면서 수영장에 수도관으로 물을 공급하듯 소량의 바닷물만 만 안쪽으로 유입되는 까닭이었다. 오로만을 병풍처럼 에워싼 아로카리아 나무들이 풍치를 더했다. 바다와 바위, 소나무가 합동으로 마련한 오염되지 않은 선물이었다.
자연 풀장의 수심은 1∼2m 정도였는데, 물은 소금기 없는 계곡물처럼 투명했다. 크고 작은 남태평양의 열대어들이 여행객들의 다리 주변을 느긋하게 헤엄쳤다. 스노클링에 제격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관광객들과 일본인 신혼부부가 하나 같이 잠수경을 쓰고 호흡기를 입에 물고는 바닷속 수족관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프랑스인 노부부는 물가에 나란히 앉아 햇볕을 쬐며 몇 시간이고 책을 읽었다. 이들은 이 고즈넉한 여유를 찾아 파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24시간을 날아왔다고 했다. 날이 저물 때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에 새들은 더욱 크게 재잘댔다. ‘구르릉’하는 먼 바다의 소리가 방안까지 들렸다.
◇천 가지 색의 바다와 무인도
다음날, 사방이 환해서 잠이 깼다. 오전 5시30분. 해는 이미 훌쩍 떠 있고, 주변은 점심때가 된 것처럼 밝았다. 이래서 카낙인들은 일데뺑을 일출이라는 뜻의 쿠니에라고 부르나 보다고 생각했다.
원주민 가족이 운전하는 모터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일데뺑에서 출발한 지 30분쯤, 짙은 청록의 바다색이 다시 옅어지더니 신기루처럼 모래섬이 다가왔다. 배는 선착장도 없는 모래사장에 여행객들을 내려놓고 “40분 후에 돌아오겠다”며 떠났다. 무인도의 이름은 노깡위. 인공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다. ‘S자’ 모양의 섬에는 하얀 고사목 더미와 갈매기, 이름 모를 덩치 큰 새만 있을 뿐이었다.
흰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천 가지 빛깔의 바다와 그 위의 하늘은, 아·름·답·다. 탄성을 발하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지만, 아무리해도 눈앞의 풍경을 담아내지 못해 안타까웠다. 연인들은 손을 맞잡고 소곤소곤 거리며 해변을 걷거나 바다에 들어가 물놀이를 했다. 일행 중 한 명이 말했다. “이런 데서 영원히 살고 싶지 않아요?”
정확히 40분 뒤 돌아온 보트를 타고 다른 무인도로 갔다. 보트를 운전했던 원주민들이 즉석에서 요리한 바닷가재와 파파야 샐러드를 내왔다. 해가 머리 바로 위에 떠 있을 때, 나는 나무 그늘에서 달콤하게 낮잠을 잤다. 잠이 깬 뒤엔 스노클링 장비를 착용하고 산호초를 구경했다. 서양인과 멜라네시안의 혼혈로 보이는 20대 커플이 백사장에 누워 일광욕을 즐겼다. 곧 결혼할 사이인데 뉴칼레도니아에 살지만 일데뺑 주변으로의 여행은 처음이라고 했다.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드는 원주민 가족과 한 보트를 타고 온 8명의 여행객들이, 보이는 사람의 전부였다. 평화로운 풍경이 어떤 사색의 공간으로 안내했다.
일데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깡위 섬을 다시 지나쳤다. 밀물이 들어 섬의 양쪽 모래 둔덕만 간신히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몇 시간 전에 봤던 그 환상적인 모습에는 못 미쳤다. 역시 신기루 같은 섬이다.
등껍질이 누런 바다거북을 만났다. 원주민 소녀가 곧바로 물에 뛰어들어 헤엄쳐 가더니 거북의 머리를 쓰다듬고 악수를 하는 것이었다. 호기심 많은 혼혈 여성도 대뜸 티셔츠를 벗더니 바다로 들어가 거북을 만지며 놀았다. 바다거북은 신기하게도 도망가지 않고 사람들의 장난을 한동안 받아줬다.
일데뺑은 울릉도의 두 배 정도 되는 152㎢ 넓이의 작은 섬이지만 육로로도 볼 것들이 많다. 섬의 남동부 쿠토만 근처에는 19세기에 세워진 프랑스 수용소 터가 남아 있다. 1871년 파리 코뮌이 실패로 끝난 뒤 쏟아진 정치범 등 중범죄자들이 유배돼 생을 마쳤던 곳이다. 한때 3000여명이 갇혀있었다지만 현재는 구멍 뚫린 석벽과 무성한 넝쿨, 지붕 위로 자라는 잡초들이 여행객을 맞았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생 모리스만에는 일데뺑에 가톨릭을 처음 전파한 생 모리스의 기념비가 바다를 배경으로 세워져 있다. 그 둘레는 일데뺑의 부족들을 형상화한 조각물들이 기념비를 지키듯 둘러서 있었다. 현재 뉴칼레도니아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이나 기독교를 믿고 있다.
일데뺑(뉴칼레도니아)=글·사진 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