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다시 링컨을 생각한다
입력 2013-11-26 18:42
1865년 2월 5일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워싱턴DC에 있던 사진가 알렉산더 가드너의 스튜디오를 찾아가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당시는 남북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때였고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링컨의 초상화를 맡은 화가 매튜 윌슨은 대통령에게 포즈를 취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링컨은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결국 윌슨이 보고 그릴 사진 촬영이 이날 이뤄졌다.
링컨 생전의 마지막 사진으로 알려진 이 사진은 충격적이다. 56세의 링컨은 70세가 훨씬 넘은 노인으로 보인다. 깊게 파인 이마와 눈 밑의 주름, 탄력을 잃은 피부, 휑한 눈, 부스스한 머리는 전쟁 4년간의 과로와 고뇌가 그의 몸과 정신을 얼마나 마모시켰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두 달 뒤 링컨은 암살됐다.
지난 19일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150주년 기념식 현장을 취재하면서 이 사진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알다시피 게티즈버그 연설을 하는 링컨을 찍은 사진은 없다. 최소한 5∼6분은 연설이 계속되리라는 예상을 깨고 2분 만에 끝나는 바람에 사진사가 타이밍을 놓쳤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연설 4개월 전 북군이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엄청난 인명 피해에 북부인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남군의 피해가 더 많긴 했지만 북군도 단 사흘 만에 2만3000여명이 사망하거나 부상했다. 이처럼 많은 피를 흘리고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지 회의론이 고개를 들었다. ‘연방의 보전’이라는 목표만으로는 부족했다. 링컨이 고민 속에 주목한 것은 1776년 미 독립선언서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명제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자유’,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였다.
인간의 삶과 존재 자체를 비약시키는 이런 숭고한 목표를 실현하는 것만이 황무지에서 피를 뿌린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할 것이라는 링컨의 말은 북부인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사적 의미를 획득한 미국의 민주주의가 남북전쟁의 피 속에서 탄생했음을 게티즈버그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링컨이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역사의 무게와 수많은 번뇌의 시간도 가슴에 다가왔다. 당시 링컨의 가정사도 순탄치 않았다. 게티즈버그 연설 전 해 둘째 아들 윌리가 병으로 사망했고, 링컨이 가장 귀여워한 막내아들도 투병 중이었다. 링컨은 게티즈버그로 오는 길에 연설 원고를 만지작거리면서도 아들의 건강을 염려했다고 한다.
역사학자 조지프 리디 하워드대 교수에 따르면 링컨은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자유와 ‘국민의, 국민에 의한 정체(政體)’가 게티즈버그 전투 등 한 번의 ‘액션’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긴 시간 속의 지난한 과정임을 알고 있었다. 이날 150주년 기념식에는 링컨이 주창한 대의에 대한 재헌신(recommitment)과 새로운 결의가 유난히 많았다. 링컨이 살았다면 현재 미국의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과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파편화된 정치시스템을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링컨의 연설에 대한 재헌신은 미국인에게만 발등의 불이 아닐 것이다. 중산층의 감소, 특정집단의 금력 장악,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는 정치시스템 등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무엇보다 공직에 몸담은 이들은 정규 교육을 받지도 못한 이 켄터키주 산골 출신이 가졌던 역사에 대한 통찰과 공공의 대의를 향한 아낌없는 헌신에 옷매무시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