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용신] 추억을 선물해주고 싶어서
입력 2013-11-26 18:42
논에서 썰매를 탔다는 얘기는 옛날 옛적 전설이었지 내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3년 전 겨울, 나는 옆 동네에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논이 있다는 얘기에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 찾아갔고 태어나서 처음 언 논에서 썰매를 타는 일생일대의 경험을 했다. 내가 난생 처음이었으니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세상에 이런 신기한 일을 처음 봤던 우리는 손수 제작한 썰매 두 개를 챙겨 주말이면 녹초가 될 때까지 얼음을 지쳤다. 물론 나는 루돌프 사슴처럼 빨간 코를 해가지고 주로 썰매를 끌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곳엔 시중에 파는 플라스틱 썰매들이 가장 많았지만 고무나 플라스틱 둥근 대야에 엉덩이를 쑥 넣은 채 얼음 위를 뱅글 뱅글 도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주방 수납장 문 한 짝을 떼어 그 위를 타고 다니는 아이도 있었다, 나무판자 밑에 스케이트 날을 붙인 사람, 심지어 싱글 침대 매트 위에 가족들을 실은 채 끈을 묶어 끄는 사람도 있었으니 언 논에 등장하는 각종 탈것들을 구경하는 재미는 더 쏠쏠했었다. 모두들 이 신기한 신세계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몸으로 집으로 향하는 길에, 한 번쯤 그 언 논을 뒤돌아보며 나처럼 그랬을 것이다. ‘논 주인 참 고맙다. 어떤 마음으로 이 논을 얼려 놓으셨을까?’
그리고 3년이 지났다. 오랜만에 그곳을 지나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논이 아닌 연꽃 밭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차를 멈춰 세우고 그 옆 판매장에 들르니 수확한 연근이 가득하다. “몇 년 전 여기 논농사 하던 곳 아닌가요? 겨울에 논에 물 얼려주셨던, 혹시 그 논 주인이세요?” 물으니 맞다고 하신다. 양수기로 7시간이나 물을 대서 얼려놓으셨다고. 어릴 때 언 논에서 스케이트 탔던 추억이 그리워서 그리 했단다. 그곳에서 2년을 그렇게 했는데 많을 때는 300명이 온 적도 있었다고 했다. 어떤 분은 고맙다고 강원도 고향집에서 만든 된장을 집 앞에 두고 간 적도 있다 하셨다. 주인아저씨 집은 논 바로 옆에 있었는데 왜 한번 찾아가 고마움을 전하지 못했을까 후회도 됐다. 그래서 연근을 생각보다 많이 사버렸다.
코 질질 흘리며 썰매 타던 딸아이를 데리고 감사 인사를 하러 한 번 더 그곳에 가는 길. 아직 다 먹지 못한 연근과 연잎차를 또 사온 것을 보면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준 그분께 고맙긴 참 고마운가 보다. 올겨울은 논 위에서 얼음을 지치던 꿈같은 날들을 생각하며 따뜻한 연잎차 한잔 감사히 마실 수 있겠다.
김용신(CBS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