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 방향타가 없다] (중) 한국 외교, 지향점 구체화해야

입력 2013-11-26 18:19 수정 2013-11-26 22:51


출발은 좋았지만 ‘격랑’ 휩쓸려 안갯속으로

방공식별구역 설정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극렬한 대립, 여기에 미국이 이례적으로 강력히 대응하고 나서면서 동북아시아가 다시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오랜 기간 이어져온 중·일 간 감정싸움이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목표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과 얽히면서 미·중·일 3각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정부 대북·대외정책의 양대 축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동북아평화협력구상 실현성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두 구상의 기본 개념은 이른바 ‘신뢰외교(Trustpolitik)’다. 그러나 현재 동북아에서는 신뢰는커녕 불신만 증폭되고 있다. 이 같은 난제를 극복하고 두 구상을 어떻게 실현할지, 이들 구상의 구체적인 지향점을 어디로 설정할지가 현 정부의 커다란 과제로 등장했다.

◇동북아평화협력구상과 괴리 큰 현실=동북아평화협력구상은 한·중·일 3국 간 정치·안보 분야의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는 소위 ‘아시안 패러독스(Asian paradox)’를 극복하기 위한 대화·협력 프로세스다. 가벼운 이슈 협력부터 시작해 하드 이슈(난제)를 포괄적으로 협의하는 단계적 구상인 셈이다.

그러나 동북아의 엄혹한 현실은 이 구상을 구체화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해묵은 역사적 반목, 영유권 갈등은 동북아 대치 구도의 핵심 요소다. 중국이 방공식별구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한 데 대해 일본이 강하게 반발하고, 우리 정부 역시 유감을 표명한 최근 사태는 영토주권에 대한 3국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첨예하게 얽혀 있는지 잘 보여준다. 여기에 미국은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를 ‘선동적 행위’로 규정하고 강력 대응하고 있다. 이 한 사건만으로 한·중은 물론 중·일, 미·중 간 갈등이 다시 한번 점화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박근혜정부의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이 제대로 운용될 수 있는지, 정부에 구체적인 이행 능력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왜곡된 역사인식과 영토분쟁으로 얼룩진 동북아 정세는 특정 국가의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을 정부가 간과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26일 “한·일 관계도 관리가 안 되는데 미국과 중국, 일본과의 복잡한 구도 속에서 어떻게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을 추진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이라며 “이 구상의 실현 가능성을 면밀히 따져보고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중·일 갈등을 우리가 중재하고, 선제적으로 평화협력이 이뤄지도록 역할을 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최근의 한·미, 한·일 관계 등을 감안하면 만만치 않다. 그만큼 동북아평화협력구상에 대한 전략적 실천 목표를 세우고 지향점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동북아에서 우리 정부의 전략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한·일 관계부터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본 정치인들의 잇따른 망언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분명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해선 안 된다”면서도 “하지만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우리 정부가 일부라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북한 변화 먼저 이끌어야=대내외 변수로 정부의 대북 원칙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도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우선 북한의 선(先) 태도변화 여부가 문제다. 이 구상은 남북이 교류협력을 통해 신뢰를 쌓고, 이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북 간 현실과 이 구상의 괴리는 현재 좁혀지지 않고 있다. 북한의 태도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신뢰가 필요한데 현 단계에선 신뢰를 쌓을 계기가 마련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우리 정부와 북한이 서로 기대하는 신뢰의 격차가 크다는 근본적 문제점도 자리잡고 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우리 정부가 개성공단에 국제 규범을 강조하는데, 남북 간 신뢰 수준에 차이가 있는데도 이것을 고수하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북한을 효과적으로 견인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신뢰를 기반으로 항구적 평화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선 먼저 상호간 논의를 통해 양보할 것은 양보하는 유연하고 전략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종연구소 백학순 수석연구위원은 “아무리 좋은 정책목표를 가지고 있어도 상대방에게 위협이 된다면 호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임 교수도 “북한은 많이 변해야 할 상대”라면서도 “협력관계가 없다면 북한은 영원히 적인 만큼 북한과 전략적 협력관계를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남혁상 모규엽 기자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