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안동현] 가계부채의 질적 변화
입력 2013-11-26 18:37
한국은행이 21일에 발표한 가계부채의 규모가 1000조원에 근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더해 미국의 출구전략이 논의되는 현재의 상황은 향후 가계부채 문제가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런 우려스러운 상황에서, 모딜리아니(F Modigliani)와 안도(A Ando)에 의해 제시된 생애주기가설은 가계부채 문제의 원인을 짚어보는 출발점으로서 유용한 경제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생애주기가설은 사람들이 현재소득이나 자산만을 근거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생애에 기대되는 소득을 염두에 두고 소비수준을 결정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사람들의 소득이 중년기에 높고 유년기 및 노년기에 낮아지는 현상에 주목하여 소득이 소비수준을 초과할 가능성이 높은 중년기의 저축을 통해 노년기를 대비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저축은 확정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은행예금뿐 아니라, 현재 가용자금을 투자하여 미래의 예상수입을 증가시키고자 하는 모든 자산증식 행위를 수반한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인 노후 대비 투자 대상은 부동산이 압도적이었고 과거 수익률이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중산층은 대출을 안고 주택을 구입했는데, 이러한 행위의 근간에는 집값 상승의 기대심리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최근 집값이 하락 곡선을 그리면서 많은 중산층들이 하우스푸어로 전락하면서 중산층 붕괴가 진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주택구입을 위한 투자 목적의 대출이 집값 하락으로 인해 가계의 대출 원리금 상환여력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 상황을 1차 충격이라고 한다면, 2차 충격은 이에 뒤따른 소비부진과 연결된 경제침체 및 부의 양극화 현상이다. 이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한 생계형 대출자들을 양산했고, 이들 중의 다수가 1차 충격으로 인해 이미 타격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현상은 연령별로 볼 때 50대의 부채가 가구당 7939만원으로 가장 높고 직업별로 볼 때 자영업자의 부채가 8859만원으로 여타의 직종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가계부채 증가율이 자산 증가율을 상회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중년층이 노후 대비를 제대로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로 인해 근로소득이 줄어드는 시기에 다른 자산으로부터의 소득 또한 기대할 수 없는 연령대의 사람들이 대출을 받아 자영업을 하는 식의 생계형 대출로, 가계대출의 질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및 고령화 진전은 이와 같은 상황을 더욱 부채질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또한 이들의 신용도가 낮다는 점과 은행의 위험 관리 수준을 높이는 정책의 풍선효과로 인해 비은행 예금취급기관과 대부업체 등 기타금융기관으로부터 고금리로 대출을 받았을 개연성이 크다. 이는 이들 기관으로부터의 가계대출 증가폭은 상승한 반면, 예금은행의 가계대출 증가폭은 하락세를 보이는 현실과 부합한다. 이러한 상황은 또다시 대출자들의 상환능력을 더욱 감소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미국이 양적완화를 거두어들이게 될 시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이자율의 상승은 이자부담을 더욱 증가시키게 될 것이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소비에 필요한 자금은 증가하는 반면,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기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 때문에 노후를 위한 투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현재의 가계부채의 규모 및 양상은 이 투자가 실패로 귀결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런데 이 실패가 단지 부채의 증가 그 자체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상황은 경제침체와 결부되어 양극화로 이어지고, 이것이 또다시 고령화와 맞물리면서 사회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차원으로 문제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책당국은 가계부채의 총량 관리뿐 아니라 이러한 질적 변화의 추이를 면밀히 분석해 보다 미시적 관점에서 관리할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안동현(서울대 교수·경제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