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연출가로 변신한 디자이너 정구호 “새로운 것을 만들려는 사람으로 기억해 줬으면…”

입력 2013-11-25 17:24


지난 15일 디자이너 정구호(51)가 10년 만에 제일모직을 떠난다는 소식에 패션계가 술렁거렸다. 전무이사 직함을 버리고 그가 선택한 첫 행선지는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다음달 6∼8일 해오름극장에 오르는 국립무용단의 신작 ‘묵향’의 연출과 의상, 무대를 맡았다. 지난 21일 국립극장에서 만난 그는 자유롭고 편안해보였다. “회사를 그만 둔 다음날, 알람을 안 맞추고 잤더니 오전 10시 반에 눈이 떠졌어요. 하루 전날까지 새벽 3시에 자서 아침 7시에 일어났었는데, 나도 이럴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싶었죠. 대학 때부터 파트타임으로 일하기 시작해 18세 이후 손에서 일을 놓기는 처음이에요.”

한눈에 보기에도 회사를 떠나기로 한 결정에 후회나 미련은 없어 보였다. 왜 지금 떠나기로 한 걸까.

“언제 떠나는 게 좋을까, 시기를 늘 고민해왔죠. 디자이너와 기업이 만나 2년 넘게 일한 경우가 없는데 10년이면 충분히 긴 시간을 한 거예요. (제일모직이)큰 주기를 끝내고 또 다른 주기를 시작하는 것이라, 나보다는 다음 세대에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도전을 하려면 지금이 낫겠다 싶었고.”

혹시 회사 측과의 갈등 같은, 말 못할 속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그는 “하하, 그런 건 전혀 없었는데. 정말이지 스캔들은 없었다고 꼭 써주세요”라며 웃었다. 누구나 그렇듯 일하는 동안 힘들고, 그만 두고 싶은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심각한 갈등이 있었던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브랜드에 대한 책임감이 컸고 패션계 후배들을 위해서도 길을 만들고 싶었지요. 10년간 최선을 다 했고 회사도 충분히 노력해줘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강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예술에 관심이 많아 꾸준히 영화 의상과 무대 연출 등에 참여해왔다. 2004년과 2008년 대종상영화제에서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와 ‘황진이’로 의상상을 받았다. 지난해 국립발레단 ‘포이즈’와 올해 국립무용단의 ‘단(壇)’에도 참여하며 무용에도 깊숙이 발 디딘 상태. 런웨이와 공연 무대는 어떻게 다를까. “패션계는 6개월 동안의 작업을 7분 안에 보여주고 그것으로 모든 걸 평가받죠. 아주 잔인해요. 그에 비해 공연은 비슷한 시간을 들여 작업하지만 1회 공연이 아니라 끝난 뒤 수정하고 다듬어 올릴 기회도 있고, 공연 자체도 남잖아요. 조금 더 인간미가 있어요(웃음).”

한국 무용은 ‘묵향’이 처음이다. “부담도 크고 약간 걱정도 되는 프로젝트에요.” 그래서 더 기본에 충실할 생각이다. “음악도 산조로, 복식도 전통복식으로, 무용도 한국 전통무용에 더 충실하게 합니다. 무대 배경도 어떤 오브제 없이 하얗고 깨끗한 배경에 2G 영상을 병풍처럼 세울 거예요. 관객들이 전통에 충실한데도 모던하다는 느낌을 받도록 하고 싶어요.” 음악과 춤, 무대까지 최대한 간결하게 보여주기 위해 오히려 엄청난 밑 작업을 하고 있다고.

무대 연출가들은 독설을 마다않는 강한 캐릭터가 많은데 그의 무기는 무얼까.

그는 “프로들이 모여서 일하는데 지적하기보다는 제 의도를 제대로 이해시켜드리는 게 더 맞겠죠. 연출가가 수장이 아니라 협업하는 거잖아요.” 스타일은 겸손하나, 집요하게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로 유명한 정구호다운 답변이다. 머릿속에 그린 작품을 100% 완벽하게 구현하는 걸 늘 목표로 해 왔던 그가 아니던가.

내년까지 주로 무용 공연 스케줄이 잡혀있지만 그것만 할 생각은 아니다. “기회가 되면 오페라도 해 보고 싶어요. 하고픈 게 너무 많으니 제가 필요하면 어디서든 찔러 주길 바랍니다.”

나이 들어 도전하는 게 두려운 건 아니다. 하지만 도전에 대한 책임감은 크게 느낀다. “한국의 전통은 현대화시키거나 바꾸지 않아도 기본만으로도 충분히 메리트가 있어요. 꼭 해외에 내보낼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어요.” 1997년 자신의 이름을 딴 ‘KUHO’ 브랜드로 시작해 2010년 ‘hexa by kuho’로 국제무대에도 진출했던 노하우를 공연 무대로 한 번 옮겨보고 싶은 듯했다.

“사실 전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이든, 연출가 정구호이든 상관없어요. 특정한 타이틀 보다는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고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으로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시간이 많아진 그는 요새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써보지 않던 근육을 이용한 스트레칭이 독특했어요. 몸이 다 찢어지는 거 같던데요. 하하.”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