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형 칼럼] 돈 키호테식 믿음 (2) 침노
입력 2013-11-25 17:09
작가 서영은의 ‘돈 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비채)의 표지에는 투구를 쓰고 방패를 든 돈 키호테가 자신의 애마(愛馬) 로시난테를 타고 창을 높이 치켜들며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의 그림이 배경으로 되어 있다. 돈 키호테가 저 멀리 보이는 풍차를 비열한 거인으로 여겨 공격하려는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된 그림이다. 돈 키호테의 몸종인 산초는 황급히 “주인님, 저것은 악당이 아니라 풍차예요, 풍차”라면서 말린다. 그러나 산초가 뭐라고 말하건 돈 키호테에게 그것은 물리쳐 없애야 할 거인이었다.
작가는 이 돈 키호테의 맹렬한 전의(戰意)를 주목했다. 이미 심정적으로는 세상의 어떤 기사보다도 참된 기사가 된 돈 키호테에게는 두려움 모르는 생생한 투지가 생겼다. 편력기사가 되어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그 진정성이 돈 키호테로 하여금 창을 높이 치켜들며 저 멀리로 돌진하게 만든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저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토지도 저당 잡혔습니다. 안락을 버리고 자신을 운명의 팔에 맡기어 운명이 이끄는 대로 갈 뿐입니다. 저는 지금 사라진 편력기사도를 다시 부흥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여기서 넘어지고, 저기서 쓰러지며, 이곳에서 떨어졌다가 저곳에서 다시 일어나며, 과부를 구원하고 처녀를 보호하고, 유부녀와 고아를 도와줍니다.”
서영은의 책에 흐르는 중심 키워드는 침노다. 작가가 굳이 제목을 ‘돈 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로 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침노는 부딪히는 것, 공격하는 것이다. 안식을 거부하고 절대선을 추구하며 세상에게 결투를 청하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천국은 침노하는 자, 부딪히는 자의 것이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부딪히지 않으면 진정한 절대선의 세계, 믿음의 본질적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쓴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처럼 끝없이 접속하는 그 마음이 기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접속이라는 영어 커넥트(connect)라는 단어의 어원은 중세 프랑스어로 ‘공격하다’는 뜻이 있다고 풀이했다. 하나님 나라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접속하려면 머뭇거리지 말고 공격, 즉 침노해야 한다는 것이다.
돈 키호테의 높이 치켜든 창은 “오직 본질만을 좇으리라. 절대선을 향해 침노하리라”는 다짐과 같다. 서영은은 자신이 돈 키호테의 길을 밟은 이유를 설명한다. “내가 이 여정에 오른 것은 예수님이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신 그 검, 혹은 돈 키호테의 높이 쳐 든 창과 같이 어떠한 자기기만도 피해갈 수 없는 그 엄정한 겨눔에 자기를 꿰어, 진정 ‘산 자(者)’로서 여생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땅에는 천국을 향해 침노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침노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상식과 안식을 거부해야 한다. 침노하는 자만이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같이 ‘산 자’가 될 수 있다. 산초로 대변되는 세상은 돈 키호테와 같이 침노하는 사람, 세상의 상식에 반하여 절대선과 접속, 즉 커넥트(공격)하려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작가는 “과연 돈 키호테가 창을 높이 쳐들고 풍차를 향해 돌진한 것이 그렇게 우습고 어리석은 일인가”라고 반문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돈 키호테가 지닌 맹렬한 전의(戰意)가 필요하다. 천국을 침노하고야 말겠다는 그 전의가.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소장 thlee@kmib.co.kr